세상에! 알베르게 주인장 부부가 우리의 아침을 차려놨다. 어제 늦게 자고, 언제 그리 일찍 일어나서 조용히 차려놨을까. 작은 토스트에 잼, 과자, 커피, 주스. 손님에게 아침을 먹이고 떠나게 하는 것에 말할 수 없는 감동이 밀려온다. 설거지는 내가 하고 싶다고 했더니 안 된단다. 자기네 일이라고... 순례자들을 위해 온 마음을 쓴다. 어제도 그 좋던 햇살에 갑자기 천둥 번개에 비가 쏟아지니 여주인이 빨래를 다 걷어서 안에다 널어놓는 것을 봤다. 아침 식사는 따로 돈을 받지 않는다. 돈이 남기라도 하나 모르겠다. 자신들도 몇 번 까미노를 걷고 난 후에 알베르게를 생각했다는데, 아무래도 정녕 '돈을 벌고자 하는 맘'은 아닌 거 맞다.
돈과 상관없이 누군가를 위해 그렇게 봉사하고 나누는 사람은 인생의 깊은 의미를 깨달은 사람일 게다. 어제 도착하면서부터 떠나기까지 모든 것이 내게는 큰 의미로 다가온다. 내 앞으로의 삶에 어떤 방향성이 생길 것 같다. 그들이 오랫동안 길 위의 사람들과 의미를 나누고 행복했으면 좋겠다.
배낭을 메고 같이 사진을 찍고 행복을 빌어주며 서로 꼭 안아주고 집을 나선다. 집과 사람을 기억한다. 'Gaia' 알베르게!
7시 20분. 청명한 날, 오늘은 레온 가는 날이다. 기대된다. 골목을 들어서는데 뒤에 프랑스 노부부가 오신다. 발과 다리가 괜찮으시냐고, 아주 괜찮다고, 아 씩씩하셔라. 고맙다. 순간순간 그분들 생각이 났었다. 왜 그런지 모른다. 통성명하다. 할아버지 ‘알랑’, 할머니 ‘이벳’, 우리는 무조건 ‘김과 오’. 잘 걸으신다. 끝까지 걸으신다고 한다. 70대 중반을 넘으셨을 텐데 대단하시단 생각. 넷이 경쾌하게 기념 촬영 찰칵!
길은 찻길로 시작해서 중간에 잠시 언덕 오르는 길, 오솔길 외에 레온 시내까지 찻길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10년 전 안내책자에는 레온의 고속도로 위를 건너는 황당한 안내가 있고 몹시 불친절한 레온을 그려놨는데, 오늘은 보니 다행히 산길을 새로 만들어서 레온으로 들어오게 해 놓았다. 생각보다 겁먹지 않고 성당까지 잘 들어왔다. 레온 성당과 그 거리를 보고 우리는 감개무량하다. 기념사진 찍고 성당 바로 뒤에 얻어놓은 호스텔로 온다. 학교 앞 건물인데 괜찮다. 딱 호스텔 수준이다.
성당은 4시부터 문을 연다 한다. 앞에 있는 바에서 맥주와 간단한 타파스로 점심을 하다. 저기 미국인 부부가 눈에 띈다. 마이클과 안젤리나졸리! 우릴 보고 들어와 같이 점심을 한다. 내일 차로 아스트로가까지 가서 거기서부터 걷는다 하니 이후로는 못 보겠네. 서로 안녕을 빌어주며 아쉬운 작별인사를 한다. 사진이 네 명 모두 환하게 잘 나왔다. 63세도 아니고 64세라 하니 우리 나이로 65는 됐겠는데 이 사람들 정말 밝게 사는 것만큼 확실히 젊어 보인다.
‘이시도르’ 성당엘 들어가 기도한다. 오늘은 5.18, 이 나라와 대통령, 그리고 J의 앞날을 위한 간절한 기도. 성당에서 기도하면 마음이 경건해지고 간절해진다. 집이나 길에서 묵상기도 하는 것과 교회나 성당에서 기도하는 것이 자세가 다름을 느낀다.
레온 성당, 아, 그때는 제단 맞은편의 스테인드글라스가 가장 인상적이고 크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보니 모든 유리창에 너무도 화려하고 정교한 스테인드글라스, 모든 벽을 다 장식하고 있다. 정말 아름다운 성당이다. 이랬구나. 그때 난 뭘 본 것일까. 한참을 올려본다. 영어오디오가이드가 있는데 아는 것만 들리는 수준. 아름답고 15C에 만들어졌고... 이런 유형.
숙소로 돌아와 잠시 쉬며 정리하다. 이따 저녁을 먹으러 나가서 성당 야경까지 보고 들어올 예정이다. 내일과 모레 걸으면 1/3 남는다. 아, 우리는 정말 완주할 수 있을 것인가. 이제는 목표를 향해 하루를 걷는 게 될 듯하다. 길이 아름다우면 금상첨화이며, 감사!
15-A코스 한림항~고내포구 13km
아침이 되면 반갑다. 밤에는 '잠이 잘 올까?' 몸은 고단한데도 이런 염려를 한다. 어찌어찌 잠은 잔 것 같다. 온전히 하얗게 지새우지는 않은 것 같다. 조금이라도 잤으면 됐다. 안 잤다는 생각을 하면 몸이 말을 안 들을지 모른다. 동쪽으로 향한 숙소의 통창문, 동틀 때의 그 멋진 장관, 구름이 많이 낀 날은 하늘이 온통 붉은 주단 무늬를 가지고 있고, 때로 바다까지 불그스름해지는 장면, 해가 올라올 때의 그 새빨간 거짓말 같은 둥그런 것이 올라왔다 싶을 때, 그 순간, 그 찰나가 황홀하다. 그리고는 바로 눈이 부시게 만드는, 바로 바라볼 수 없게 만드는 해는, 이제 흔한 그 해가 되어버린다. 아침을 먹고 문을 열고 들어오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후끈한 열기가 가득 차 얼른 커튼을 닫게 되는, 이런 아침.
커피를 타고 음악을 틀어놓고 멍 때리거나 책을 읽거나 노트북을 열거나 이런 아침의 여유 시간.
그리고 날씨에 맞는 옷을 입고 배낭을 챙기고 등산화를 신고 나간다. 오늘의 중요한 일, 걸어야지. 하루는 하루만큼의 길이 있다. 오늘은 그 길만 걸으면 된다. 내일 것까지 미리 걸을 필요도 없고 내일은 또 내일의 길이 있다. 늘 걸을 길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좋으냐. 이걸 일로 하려면? 가이드들은 즐거울까? 우리는 돈을 내고 걷고, 그들은 돈을 받고 걷는 차이일까?
나는 온전히 즐겁다. 걷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다. 하루 대여섯 시간 풍경을 보며 길을 보며 걷는다. 내 인생이 그냥 걷는 거였다면 나는 즐거운 인생을 살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어느 기간, 집중적으로 이렇게 걷는 것이 즐거운 일일 게다.
--------
오늘은 비교적 짧은 코스라니 마음 편히, 주로 바닷가를 걷는 날이다.
한수풀(림) 해녀학교를 지난다. 그래서인지 가까운 바닷가에 해녀복을 입고 많은 이들이 공부 중? ' 맑은 물에 재밌겠다' 한참 구경 삼매경. 나중에 보니 잡은 소라를 저울에 달아 파는 사람들이 모여 있다. 진짜 해녀들도 많았구나.
곽지해수욕장. 물이 너무 깨끗하다. 맨발로 걷다. 해수욕장이 넓지는 않으나 모래가 부드럽고 깨끗하고 맨발이 행복하다. 멀리 물 색깔은 이 세상 색이 아닌 듯, 옥색과 하늘색과 감색과 진한 청색... 이유가 있겠으나 '어떻게 저런 색깔이 가능하나' 하며 걷는다.
애월 카페거리는 여전히 북적인다. 한적한 카페 바닷가 쪽에 자리 잡아 맥주 두 병 사들고 앉다. 빵이랑 구운 계란은 안주로. 좋구나. 맥주를 마시고 일어나면 처음엔 다리가 묵직해진다. 근육이 놀란 건지 풀어지기 전인지.... 그러나 좋은 것은 확실하다. 제주에 있을 때 걸을 때 따가워서 그렇지 날씨는 기가 막힌 거다. 이제 3킬로 정도 걸으면 된다. 애월항 있는 그 지루한 길을 걷다 고내포구 가기 전의 그 마을 길, 깨끗한 집들과 단정한 마을, 한적하고 예쁘다.
2시 반에 포구에서 출발해서 숙소에 3시 20분쯤 도착했나 보다. 오늘 걸은 길 하나, 버스에서 돌아본다. 하루하루는 이렇게 마무리가 된다. 일주일 남았다. 일곱 코스 남았다는 이야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