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하늘이 하늘색보다 더 진한 날이다. 17km 정도를 중간에 아무것도 없는 도로를 걷는다고 준비 철저히 하라고 막 겁을 줘서 슈퍼에서 빵이랑 물이랑 간식 등을 사놨다. 이렇게 긴 구간 문명의 힘이 미칠 곳이 전혀 없다는 말을 들으면 우리는 긴장을 한다. 이제는 오히려 자유로움을 느껴야 되지 않나 싶은데 말이다. 그런데 중간에 임시 휴게소가 있어 간단한 식사를 할 수 있게 해 놨다. 괜히 안심이 된다. 빵과 주스를 아침으로 드셔주시고 힘차게 출발!
길은 역시 쾌적하다. 햇살이 아침부터 작렬하지만 뒤에서 비춰주는 고마운 님이다. 긴 그림자를 앞으로 거느리고 우리는 그림자와 함께 걷는다. 길을 걸을 때 아침마다 우리 앞으로 나타나는 긴 그림자는 참 반갑고 인상적이고 멋지다. 가끔 우리와 거꾸로 산티아고에서부터 생장까지 걷는 사람이 있는데 해를 정면으로 받으면서 걸어야 하기에 무척 힘들 것이다. 대단하단 생각. 늘 뒤에서 인사하는 해는 정말 고맙고 눈치 짱이고 분신 같은 배경이다. 아침에 잠시 흩뿌려주는 비 역시 고마운 배경이며, 하늘, 저 완벽한 하늘색과 진한 구름... 그냥 그 자체가 그림이며, 은총이다.
마을이 하나 나오고 우리는 또 주스를 시켜 싸 온 빵과 함께 점심을 먹는다. 이상하다. 빵과 주스는 질리지도 않을 뿐더러, 먹고 나면 온몸이 좋은 기운으로 충전됨을 느낀다. 걷는다. 앞으로 10km 정도 걸으면 된다. 불편하지 않다. 덥지도 춥지도 않다. 오늘 숙소 예약을 해놨기에 아무 생각 없이 온다. 걸으면서 많은 생각을 할 줄 알았는데 사실 별생각 없이 온다. 아주 단순하다. 걷다-보다-아름답다-행복하다-감사하다. 이 정도이다. 무슨 생각이 필요하랴 싶다. 가끔 뭔가 깨달음이 있어 폼 잡고 좋은 글을 썼으면 좋겠다는 욕심을 내지만, 욕심임을 안다.
숙소에는 이미 많은 순례자들이 도착해 있다.
빨래하는 사람, 맥주를 마시고 수다를 떠는 사람, 글을 쓰는 사람, 쉬고 있는 사람... 각자 자유롭게 시간을 보내고 있다. 미리 예약을 하지 않은 사람이 다른 숙소를 향해 나선다. “예약한 사람들이 싫어!” 들으라는 듯 큰소리로 얘기하며 나가는데 예약한 우리는 좀 미안하다. 다행히 우리는 그녀보다 먼저 도착했으니 좀 덜 미안하긴 하다만.
알베르게를 미리 예약을 하는 것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단다. 도착하는 대로 받아야 한다는 쪽과 예약을 하는 것이 맞다는 쪽, 둘 다 일리가 있고 단점도 있다. 비율을 나눠두는 게 합리적이라는 생각을 한다.
숙소는 깔끔하다. 햇살은 좋다. 바람이 분다. 머리를 감지 않는다. 수건이 작아 말리기가 불편하고, 햇살이 따가워도 바람이 불기에 머리가 젖어있으면 몸이 싸늘해진다. 감기 걸리기 딱이다. 오늘 스승의 날이라고 녀석들이 카톡을 남겨놨다. 처음으로 학교에서 맞지 않는 스승의 날이다. 고마워... 오늘도 매우 좋은 길, 감사한 날.
오늘은 제자 녀석 Y를 위해 기도를 드린다. 잘 커야 할 녀석이다. 그 부모님을 위해서도 기도드린다. 녀석 때문에 속 썩는 날이 그만이길, 녀석이 철이 들길, 잘 성장하길.
14-1코스 저지예술 정보화 마을~ 오설록 9.3km
거리가 길지 않고 난코스도 없으니 여유로운 길이 될 것이다. 특히 문도지오름과 곶자왈이 기대되는 길.
관광지이지만 오설록의 녹차밭 풍광도 그 나름 좋으니, 최대한 천천히 걷다가 오설록에서 녹차라테 한 잔 하며 녹차밭 감상하는 걸로 계획을 세운다.
기온은 많이 높지 않으나 바람이 없어 해 쨍쨍한 날은 바로 더워진다. 그러나 걷기에 쾌적한 날씨다. 예전에 걸었던 길과 반대로, 순방향으로 걸으니 길이 또 새롭다. 오름에 오르기 전까지는 포장된 도로의 넓은 숲길을 걷는다. 날이 좋으니 흙길이 아니더라도 무성한 숲을 보며 걷는 길이 한적하고 평화롭다.
처음 제주를 걷는 사람은 어느 길이나 다 예쁠 것이다. 지금 나는 선택적으로 좋은 길과 좀 지루한 길, 재미없는 길, 왜 이런 길을? 이런 평을 하고 다닌다만...
드디어 문도지 오름으로 오른다. 저기 그 멋진 능선이 보인다. 역으로 올 때는 올라오면 바로 정상이면서 탁 트인 사방이 우리를 환호하게 만들었는데, 여기는 밑의 능선에서 위의 정상을 보게 된다. 뒤로 한라산이 펼쳐진 모습이 역시 멋지다. 정상으로 오르는 길에 말똥들 천지다. 산티아고의 소똥 생각이 나서 움찔~.
정상엔 말들이 모여 어슬렁어슬렁 하고 있다. 저 말들을 지나가야 하는데, 큰 눈으로 우리를 요렇게 보고 비켜줄 생각을 않는다. 말 뒤로 피해 갈 수는 없다. 뒷발차기 명수이니 걷어차이지 않게 조심하라고 아침에 안내받았다. 잠시 우리도 요렇게 쳐다보고 있으니, 신기하게 말 한 마리가 우리에게 길을 내준다. 얌전히 지나간다. 고마워.
역시 오름은 오름이다. 제주의 정중앙인가? 한라산 산방산 모슬봉 송악산 다 보인다. 그 정상들과 문도지 오름 사이에는 모든 곳이 곶자왈로 보이는 숲. 제주 참 대단하다. 사방이 트인 곳에서 말들도 끼여주고 폼 잡고 사진 찍는다.
이제 곶자왈로 향하면 된다. 아름다운 곶자왈이 끝나면 종점인 오설록이다.
곶자왈에 들어서는데 여전히 말똥이 널려 있다. 말이 드나들지 못하게 문을 해놓은 것을 보니 말들이 지나다니는 곳인가 보다. 말 세 마리가 지나간다. 마지막 어린 말이 우리 보고 놀랐는지 갑자기 쌩하니 달려간다. 깜짝이야. 그리곤 부모에게 다가가서 고자질하듯 히힝~ 울어댄다. 아 또 깜짝이야. 쟤네 부모가 달려오면 어쩌지? 뉴질랜드에서 나를 가로막은 양들 가족의 소란도 떠오르고.
어느 순간부터 말의 구역과 인간의 구역이 나뉜 듯, 말똥 없는 오롯한 곶자왈의 아름다운 숲길이 나타난다. 곶자왈 특유의 깊숙한 나무와 돌과 풀들과 이끼들... 역시나 좋구나. 근심이 내려지는구나. 이 길이 곧 끝날 것이다. 앉아서 고 천천히 걷는다.
그리고 저기 초록의 녹차밭 천지... 도장 찍고 우리는 완전 더 자유로워진다. 그렇다. 도장을 찍으며 다니면 목표가 있는 것도 같고 숙제가 있는 것도 같고 그 길로만 가야 할 것 같고 일단 그 일을 끝내놔야 할 것 같고... 도장을 다 찍고 나면 뿌듯하고 성취감도 있고 의미 있는 것도 같고 잘한 것 같고 다 이룬 것 같고.... 그러나 그것일 뿐이다. 우리는 걸었을 뿐이고 오늘 할 일을 했을 뿐이고 약속을 지켰을 뿐이고 별일 없이 안녕하게 걸었다는 것이고, 감사할 뿐이고.
관광지는 속세이다. 하늘하늘한 옷에다 젊은 청춘들에다 북적이는 카페에다 녹차밭에 들어가 온갖 포즈로 사진을 찍으며 하하 호호 웃어대는 환희의 속세.
우리는 등산복을 입고 투박한 등산화를 신고 먼지 뒤집어쓰고 모자 눌러쓰고 장갑 끼고 온몸을 가리고 깊은 숲 속에서 나왔는데, 속세가 이렇더라.
길고 넓은 녹차밭을 내다보면서, 사진 찍는 이들 재밌게 바라보면서, 푸른 눈으로 차 한 잔 하다. 좋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