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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아헤스/ 하모 해수욕장

by 순쌤

벨로라도~Ages 27.7km

흐리다. 찻길 대신 흙먼지 나는 길이 이어진다. ‘오르테가’까지 숙소가 션치 않아 3km 더 가서 아헤스(Ajes)라는 곳에 머물기로 한다,

하루 20km가 딱 좋고 25km는 약간 무리인데 27km 정도 걸으려니 부담스럽다. 하지만 길은 걷게 되어있음을 안다. 배낭은 맡기고 걷는다. 상쾌하고 기분이 좋다. 몸이 가뿐하다. 익숙한 풍경인데도 길은 늘 새롭다.


이 길을 걸으며 하루에 천국을 여러 번 맛본다 했다. 풍경 좋고, 길 좋고, 걸을 수 있고, 음식 맛있고, 맥주 한 잔 와인 한 잔이 맛있고, 딱히 걱정 없고.... 딱 하루살이의 삶, 내일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삶, 잘 입을 필요도 잘 먹을 필요도 없이 주어진 것을 먹으면 되는 삶, 주변의 사람이 아프거나 힘들면 같이 걱정해 주고 뭐 필요한 거 있나 자연스럽게 배려하게 되는 삶, 다른 사람에게 피해 안 가게 조심해 주는 삶, 그리고 충분히 독립적이고 자유롭게 생각하며 사는 삶, 누구에게나 공평한 발로 걷는 삶... 돈이 많아도 필요 없고, 돈이 많이 없어도 크게 불편하지 않은 삶.


우리 아이들도 지금 그러고 있는가.

집이 있고 밥이 있고 피자 있고 엄마 잔소리 없고... 천국을 느끼길.

오늘은 어버이날이라고 톡으로 소식을 보내왔다. 어느 풍경보다 또 감동이다. 울컥한다. 설혹 의례적인 것이든 뭐든 그렇게 생각하고 올렸다는 게 기특하다. 잘 키워주셨다. 예전 같으면 내가 키웠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음을 안다. 주변 분들이나 공동체의 기도, 도움, 보이지 않는 곳에서의 양육... 감사하다.


알베르게에 와선 어제 산 컵라면에 맥주를 하다. 맛있어라. 방은 한국인 젊은이 둘, 프랑스인 노부부(우리보다 먼저 도착하셨다. 아침에 만났는데) 그리고 다른 이 둘, 여덟 명이다. 저녁은 빠에야, 쌀이 익지 않아 맛이 없다. 앞에 앉은 분은 영국 웨일즈에서 혼자 온 69세 된 아저씨. 이런저런 얘기하다가 어떻게 오셨느냐고 묻는데 아내 사진을 보여준다. 작년에 죽었다고. 이런...

왜 혼자 왔어요? 이렇게 듣진 않으셨겠지?

작고 오래된 성당이 있다. S를 위한 기도를 드린다. 혼자 씩씩하게 딸을 키우며 살아온 그녀에게 안정된 마음과 기쁨을 주시길 기도한다. 돌아보면 주변에 기도를 드리고 싶은 사람들이 많다. 그럼에도 나는 이렇게 평화롭게 여행을 다니고 있다. 이게 미안함이다. 기도는 나의 몫이란 생각이 든다.

8시도 안 됐다.


10코스 화순해수욕장~ 하모체육공원 15.6km

올레 생기고 제일 처음 왔던 길, 가장 좋아하는 길, 가장 많이 온 길.

화순해수욕장부터 산방연대라는 곳까지 원래 있던 길로 복원되고 처음이다. 날은 역시 맑고 쾌청하다. 대부분의 날이 이렇다. '제주의 10월이 이렇구나' 다시 확인. 사진은 참 선명하게 잘 나온다. 때로 색이 현실적으로 보이지 않고 합성한 것 같이 짙다.


내 사랑 산방산을 가까이서 요리조리 한번 더 알현하고, 드넓은 사계포구로.

등산화를 벗는다. 햇살 쏟아지는데 파도 몰아치는데 발이 아늑하다. 검은 것이 이렇게 포근한 모래라니... 발이 호강이다. 내 몸이 호강이다. 우리는 또 웃고 신난다. 형제섬은 그러거나 말거나 그림 같이 묵묵히 인간들을 지켜본다 이거지. 그 앞에서 신발 들고 척! 파도랑 더 놀고 싶기는 하다. 그러나 윗길의 너른 평야에 나 있는 길이 얼마나 평화로운지 알지. 발을 씻고 올라간다. 일행들이 앞뒤로 이어진다. 오늘은 한 40여 명 걷나 보다.

이 길을 걸으며 몇 가지 불편한 생각한다.

걷는 것도 습관이 되어버린 것 아닐까? 몇 번째 오는 이 길을 걸으며, 흥분이 아닌 이 익숙한 느낌! 처음 온 사람이 느끼는 그 감동과는 비교도 안 될 게다. 게다가 따로 걷기는 하지만, 버스를 같이 탄 일행들이 보이고, 가방에 매달린 일행이라는 표지가 보이고, 가끔 가이드가 기다리고 사진 찍어주고 하는 것이 보일 때, 다가오는 부자유스러움! 끼니, 숙소, 차량을 다 해결해 줘서 걷기만 하면 되는, 이 편리함을 누리기만 하면 되는 이런 걷기 괜찮나? 걷기 자체가 오락거리가 되거나 만능의 즐거움으로만 인식하고 있는 것 아닐까? 생각들과 의문들이 이어진다. 가장 좋아하는 아름다운 이 길을 걸으며....


송악산을 오르기 전에 입구 정자에서 점심을 해결한다. 오늘도 좋아하는 쑥떡, 그리고 커피. 10월의 토요일이라 사람이 많은 것은 그러려니 하고 먹다. 천국의 식사 정도는 되지 않았다는.

드디어 송악산을 오른다. 마라도와 가파도가 더 가까이 있다. 날씨 때문인가 저렇게 가까이 펼쳐져 있는 것은 또 처음이다. 계단을 오르락내리락, 잘했다.

4.3 희생자 유적지를 지나고, 중간 도장을 찍고 이제 하염없이 밭길을 걷는다. 꽤 길었던 기억이지. 그래도 걷는다. 끝이 있다는 게 좋지 않은가. 다 왔다. 남은 간식 알뜰히 잘 먹고 버스 탑승. 모든 게 정확하다. 계획적으로 진행된다. 깔끔해서 좋다.


또 한 주 잘 다닌 기념으로 저녁은 치킨에다 맥주를 하기로 한다. 우리 식당 아래서 냄새 솔솔 자극했던 치킨을 주문해서 맥주와 아주아주 맛나게 먹다. 걱정했는데 거뜬히 한 마리를 다 먹었다. 둘이서 잘도 먹는다. 잘도 걷도. 이런저런 유쾌한 농담을 하며 우리의 파티는 잘 끝나고, 서귀포칠십리 축제한다고 쿵작거려싸니 잠시 다녀오고, 이마트에서 피노누아 와인 하나 사고, 이미 술기운은 가셨으나 일기 쓸 여력은 안 되고,

일요일 아침 도서관에 와서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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