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6. 로스 아르코스/ 서귀포 올레 센터

by 순쌤

에스테야~Los Arcos 20km

짐 없이 걷다. 날이 흐리고 빗방울이 떨어지는 것 같더니 저기 무지개가 떴다.

‘이예가', 와인이 나오는 수도꼭지!

정말? 재밌겠다고, 마셔봐야지 했던 곳이다. 와이너리가 있고 순례자를 위해 옆에 와인잔도 마련해두었다. 참 멋지게 사업을 하는구나. 수도꼭지를 틀어 딱 한잔 따라 마시고 기분 좋게 미련 없이 걷는다.


바람이 불기도 하고 잠시 비가 흩뿌리기도 한다. 구름 잔뜩 낀 날, 걸을 때 조금 슬퍼진다. 이런...

푸른 들판, 끝없이 이어진 길, 샛노란 유채꽃밭, 너무 아름답다. 스페인 이 길은 아마 끝까지 이렇게 아름다우려나보다. 오늘은 사진에 꽃들을 담았다. 이름은 모르겠고, 처음 보았고, 자세히 보니 예쁘고, 종류도 무쟈게 많고, 그렇구나.

그리고 딱히 일이 없다. 꽃들도 그러지 않을까. 꽃은 거기 피어 있으면 되고, 사람은 걸으면 되고. 급하게 갈 일도 없고 숙제도 없고 해야 할 일도 없고, 장자님 얘기하신 '무위의 삶'이 이런 것일까?


1시 30분쯤 알베르게에 도착, 예약을 하지 않았으나 자리가 있다. 한 방에 침대 12개 정도의 도미토리, 아침과 함께 둘이 25유로. 밖에서 피자와 맥주 하나로 점심을 먹고 들어와 샤워하고 끝.


내일은 27km정도 걷는다 한다. 숙소는 예약해 놨다. 이렇게 하면 이젠 내일은 걱정 없지. 하루살이이다. 이렇게 오늘 하루를 살아내고 내일 잘 곳만 정해져 있음 모든 게 갖춰진 거다. 완벽한 거다. 내일 잘 곳을 예약하지 않고 다니는 사람도 많다. 자리가 없어 낭패를 당하기도 하지만 몇 군데 돌아다니거나 그도 안 되면 조금 더 걸어가 다음 마을로 가면 된다. 사람이 많은 성수기 때는 힘이 들겠지만 지금은 조금 사정이 나은 편이니 그렇게 가도 된다. 그러나 소심한 우리는 그냥 내일 잘 곳을 정해놓으면 마음이 편하다. 그냥 걷기만 하면 되니까. 걷고 나면 잘 곳이 있으니까... 이 정도이다.


다리와 무릎과 허벅지까지 뻐근하다. 사람들이 서로 시끄럽게 인사하고 떠들고 하는 게 좀 불편할 때가 있다. 수다를 떨고 싶어도 언어가 다르니 간단한 인사 하면 끝. 영어 쓰는 나라는 좋겠어.


저녁을 먹고 성당으로 간다. 순례자를 위한 미사가 있단다. 미사를 마친 후 한 할머니가 내게 다가와 자꾸 성당 앞으로 나가란다. 알고 보니 우리를 위해 신부님이 기도를 드려주는 시간. 신부는 기도를 올리곤 각 나라말로 순례자의 기도가 적힌 조그만 기도문 종이를 준다.

“가는 길을 안전하게 지켜주시고, 집에서 이들을 기다리고 있는 가족에게 안전하게 돌아갈 때까지 ...”

'가족..' 이 부분에서 잠시 울컥하다. 그래, 안전하게 돌아가야 해, 기다리고 있는 우리 아이들에게.

그리고 종탑에 올라가 종치는 소리를 듣다. 울리는 종소리 엄청 커서 깜짝 놀란다. 순례자나 관광객을 위한 행사다. 기도드려주는 모든 이에게 감사하다.

오늘은 K를 위해 기도를 드린다. 힘들게 살고 있는 사람이다. 성격 좋은 사람이 사람에 의해 어려움을 겪고 있다. 몸도 연약하여 더 힘든데 거둬야하는 분도 있다. 그 가정을 위로하여 주시고 기쁨과 축복 누리게 해 주시길.


6코스 쇠소깍~서귀포올레 여행자 센터 11km

쇠소깍을 지나 게우지코지에서 바라보는 한라산과 저 아래 펼쳐있는 빛나는 바다가 어우러진 모습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늘 그림 같은 풍경을 보여주고 있을 텐데 여기 사는 사람, 카페를 열고 있는 사람, 나보다 더 자주 제주를 오는 사람 등등은 어떤 말로 정확하게 표현을 할까?


제지기오름에 올라 섶섬을 봤을 때, 그 섬의 아래를 두르고 있는 바위들을 볼 때도 그렇다. 그냥 평범한 모습이 아니다. 신비롭다. 오늘 보니 맑은 날 한라산을 배경으로 펼쳐진 '소천지'는 정말 말 그대로 '작은 천지' 같다. 처음 이름을 붙인 사람은 어느 순간 딱 그 모습을 보았을 것이다. 그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여행을 다니다 보면 이름 참 잘 지었다고 감탄할 때가 있다. 이름이 그냥 나오는 게 아니다. 물론 어느 때는 왜냐고 되물어야 할 때도 있지만 말이다.

소천지를 전후로 이어진 숲길은 역시 변함없이 평화롭다. 떨어진 솔잎들이 무성하니 푹신푹신하다. 갈색의 오솔길을 걷는 발걸음이 편하다.


이중섭 거리와 올레시장을 지나면 종점인 서귀포 올레 여행자 센터다. 나중에 완주하면 다시 올 곳.

종점 도장 얼른 찍고 되돌아 '제주약수터'로 온다. 올레시장 안에 있는 수제 맥주집인데, 오늘 걷기 끝나면 들르자고 계획했다

시음 후 두 잔 주문, 이름하여 '남쪽나라'와 '올레길'!

외국에 온 것 같다. 아는 이 없고, 대낮에 야외 바에서, 오늘 걸을 길 끝내고, 덥고 지친 몸을 위한 한 잔! 시원하다. 이 기분은 또 뭐라 표현할까.

"음, 바로 이거야!" 이 정도.ㅎ

몸이 둥 날아오르는 기분이다.

걷고 먹고 자고.

우리 이제 이렇게 단순하게 살면 참 좋겠어.



keyword
이전 07화5. 에스테야/쇠소깍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