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날씨는 안개비가 흩뿌리는 걸로 시작한다. 얇은 패딩을 입고 비옷까지 걸치면 몸이 따듯해오고 온기가 퍼지면서 심신이 안정적이고 편안해진다. 그렇게 한 10분 걸으면 안개비가 그치고 우리는 우비를 벗는다. 그다음에 햇살, 따사로운 햇살이 등 뒤에 올라와 우리의 긴 그림자가 앞에 나타나면 패딩을 벗는다. 이후로는 파란 하늘 아래 길게 뻗은 길을 가볍게 또는 묵묵히 걸어가는 이런 풍경이다.
중간에 여러 작은 마을이 나타나고 거기에 Bar도 있고 알베르게도 있어 잠시 앉아 휴식을 취한다. 오렌지를 통째로 넣어 갈아 만든 주스나 콜라나 맥주나 커피나 빵 등으로 간식이나 점심을 먹는다. 특히 오렌지 주스는 몸을 다시 살아나게 만드는 싱싱한 마력을 지닌 것 같다.
지나가는 사람들과 인사한다. 알베르게에서 같이 묵었던 사람이기도 하고, 길을 가다 안면이 있던 사람이기도 하고, 처음 보는 사람이기도 하다. 만나는 사람들은 누구나, 누구에게나 친절하다. 인사는 진심이다.
올라! 부엔 까미노! 아름다운 길을 공유하기에 저절로 인사가 나온다. 서로 고된 몸인 것을 알기에 동지의식이 있는 거다. 순례자의 마음으로, 기도하는 마음으로 걷기에 옆에 있는 사람들이 귀하다. 각기 다른 나라에서 왔기에 이국인에 대한 관심과 배려가 있다. 그래서 서로에게 친절하고 웃어주고 인사하는 것이리라.
25km 내외의 길을 걷고 힘이 들 때쯤이면 멀리 마을이 보이고 어김없이 높은 첨탑이 달린 교회가 나타난다. 저 멀리 뵈는 시온성~ 거기가 오늘의 목적지이다.
오늘 숙소는 사설 알베르게이다. 공립보다 가격이 좀 있는 대신 시설이 좋은 편이다.
간단한 빨래도 하고 씻고 나니 4시. 이후 저녁 먹을 때까지 한가하다. 여정을 기록하거나 식사를 하는 일 외엔 일이 없다. 빨래를 맡겨 긴 팔이 없으니 좀 춥다. 2층 침대에 잠시 누워 있는데 갑자기 비상벨이 울린다.
1층 침대에 있는 미국할머니가 후다닥 달려 나가신다. 우리 둘은 그냥 있다. 부엌에서 연기 때문에 벨소리가 났다고 알려주신다. 고기 굽는 냄새가 올라온다. 한국인인가?ㅋ
에스테야, 많은 성당과 교회가 있는 번화한 곳이다. 어슬렁 저녁을 먹으러 나간다. 산후안 성당 앞 광장이 있고 '페리그리모 10유로'라 쓰여 있는 바로 들어간다. 큰맘 먹고 15유로짜리 정식코스를 시킨다. 아스파라거스 볶은 것과 새우튀김이 전채요리, 비프스테이크와 생선이 메인 요리, 커피와 파인애플이 후식, 그리고 맥주와 와인, 서울에서도 이렇게 먹어본 기억이 별로 없다. 순례자를 위한 이런 멋진 요리를 가성비 좋게 먹는 것이 호사로다. 복 받으시길.
숙소로 들어오니 8시. 이제 정말 아무것도 할 것이 없다. 그냥 누워서 뒹굴다 자자. 낮에 열심히 걷고 저녁은 일찍 잔다. 저녁이 있는 삶? 저녁이 없는 삶?
오늘은 L님을 위한 기도를 드린다. 그 가정과 당신을 위로해 주시길,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단 말씀이 너무 멀지 않게, 꼭 실현되길.
5코스 남원~쇠소깍 13.4km
비가 잠시 내릴 듯하고 오늘 길이는 13킬로 정도니까 가벼울 것이다.
아침에 침대에서 창밖을 보며 바다 위로 구름이 어떻게 꼈는지, 여명의 눈동자가 어떻게 펼쳐졌는지를 다 뜨이지 않은 눈으로 확인한다. 심상치 않은 하늘을 보며 아, 오늘은 저렇게 햇살이 퍼졌구나 하고 일어나 창문을 열고 바람을 들인다.
오늘은 어떤 반찬? 이런 기대는 접고, 아무튼 맛있는 집밥이 있을 거라 믿고, 동네 한 바퀴 돌고 식당으로 들어간다. 부지런한 사람들은 7시도 전에 와서 밥을 먹고 있고 우리도 줄을 서고, 오늘의 양식을 스캔한다. 역시 깔끔하고 다양한 나물이며 두부며 야채와 국이다. 감사한 마음으로 숟가락을 든다. 오늘 하루 걸을 힘을 주는 밥임을 안다. 딱 배부르지 않을 정도로 든든히 먹고 깔끔히 비운 접시를 놓고 나선다.
7시 10분 정도의 아침 바람과 공기는 풍족하다. 숙소로 들어오며 개운한 알갱이 커피를 마실 생각에 웃는다. 바다가 펼쳐진 창밖을 한번 더 보고, 음악을 켜놓고 커피를 타서 침대 위에 앉는다. 흠~ 오늘 걸을 길을 한번 훑어보고, 서귀포중앙도서관에서 빌려온 책도 읽고, 버스 시간에 맞춰 옷을 갈아입고 배낭을 챙겨 들고 나온다.
오늘은 남원포구에서 시작. 구름이 짙게 끼어있고 바람은 세지 않다. 남원큰엉까지의 명품숲길로 들어서다. 처음 이 길을 걸었을 때의 놀라운 감동은 아니지만, 몇 번 걸은 이 길은 이제 동네길처럼 익숙하다. 큰엉을 지나 바다에 깔린 검은 현무암이 깔린 길, 이어진 숲길이 오히려 새롭다. 위미 동백숲의 그 담벼락에 앉아 간식도 천천히 먹고, 오늘은 뒤에서 여유 있게 걷는다.
위미항까지 가는 길은 위미 마을을 돌아가는 길 대신 새로 생겼다는 다리를 가로지른다. 억 소리 나는 많은 돈을 들여 관광 명물로 만들었다는데, 다리 위에서는 고기잡이 배들이 떠 있는 다소곳한 위미항과 멀리 온몸을 드러낸 한라산을 조망할 수 있다. 바다와 산이 한 쌍으로 어우러진 멋진 풍경이다.
빗방울이 떨어진다. 비는 처음이다. 모자에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걷는데 분위기 있다. 공천포구, 그리고 하례마을을 지나 쇠소깍다리 종점에 이르기 전까지 나타나는 숲길이 또 숲터널이다. 비는 더 밀도 있게 흩뿌리고, 2시 쇠소깍다리에 도착하다. 오늘 걷기는 오랜만의 빗속에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