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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팜플로나와 표선해수욕장

by 순쌤

팜플로나/표선

수비리~Pampelune 20km

짐을 맡기고 걷기로 한다. 옆 침대에서 코 고는 아주머니 덕에 힘들었다. 딸과 함께 온 이 스페인 아주머니의 소리는 대단했다. 아침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엄마는 씩씩하게 얘기한다. 자신은 산티아고까지 걸을 거고 엄마를 위해 짬을 낸 딸은 팜플로나까지만 걷는다고. 딸이 상냥하고 참 예쁘다. 바스크출신이라고 얘기하는데 이 지방의 뭔가 불편한 관계가 있는 느낌이다. 비가 온다. 저쪽 하늘은 개는데 비가 온다. 우비를 입고 걷는다. 숲길을 걷는 걸음과 이 날씨는 상쾌통쾌하다. 감사가 절로 나온다.


작은 마을을 몇 지난다. 완전 시골도 아니면서 도시 냄새도 적당히 나고 사람들이 여유롭게 거니는 마을을 보면 이런 곳에 살아보고 싶단 생각을 한다. 차가 다니고 길도 복잡해지고 화살표도 정확하지 않은 번잡한 마을을 대하면 조금 불안해진다.

어디쯤에서 배는 고프고 점심은 먹어야겠고 식당이 있는 곳을 찾는다. 우리는 혹시나 끼니를 거르게 되지 않을까, 끼니는 꼭 챙겨야 하는데... 이런 밥에 대한 진심이 있는 것 같다. 마음이 좀 급해지고 소심해진다. '뭐, 가다 보면 괜찮은 데 나오겠지'라든지, '안 나오면 간식 대충 먹으면 되고', 이런 여유 없이 눈에 보이는 곳이면 아무 데라도 들어가서 끼니를 위한 식사를 한다.

오늘 다행히 파스타가 맛있다. 맥주도 한 잔 곁들이니 기분 확 풀어진다. 우리를 닮은 순례자 부부가 식당으로 들어온다. 소심한 마음이 조금 위로되며 기분이 좋아진다. 이 소시민적인 소심함이 나는 맘에 들지 않는다.


팜플로나를 들어올 때 커다란 성벽을 만나다. 오래된 성벽을 보자니 이 도시가 평범한 도시가 아님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겠다. 성벽의 문을 통과하는 것도 멋지다. 달뜬 기분으로 커다란 문을 통과하니 그곳에 짠~ 도시가 펼쳐진다. 중세의 공간에 현대의 사람들이 건너와 즐기고 있는 모습이라 해야 할까, 사람들이 낭만적으로 보이고 생기가 느껴지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도시를 누리고 있다. 성문을 들어오면서부터 이미 이 도시가 완전 맘에 들기 시작한다.


알베르게도 금방 찾는다. 2층 독립적인 구조로 된 공간에 깔끔한 침대가 놓여있고 시트랑 베개 커버도 새로 주니 벌레 걱정도 없고 막 믿음이 간다. 씻고 거리 구경을 간다. 중세도시풍 건물들, 성당들, 박물관들, 상점들, 바들... 무척 활기차다. 여기서 소몰이 경주를 한다는데 분위기 딱이겠다. 좁은 골목골목이 다 살아있다. 그 골목에서 황소 떼가 뛰쳐나가고 사람들이 도망가고... 상상을 할수록 이해 안 되는 문화이기는 하나 충분히 격동적인 장면들이 그려진다. 이 지역은 바스크지역이라 한다. 아침에 만난 모녀가 굳이 자신들은 바스크민족임을 밝혔던, 독립하고자 하는 마음이 강한, 뭔가 저항하는 분위기... 마침 상점의 셔터문에 게르니카가 그려져 있는 것을 보다. 흠, 느낌이 온다.


광장 Bar에서 맥주를 한잔 하고 중국인 상점에서 라면과 햇반을 사서 들어오다. 여행 같기도 아닌 것 같기도 한 이 여행. 밖은 천둥에 비가 쏟아지는 소리가 요란하다.


오늘부터는 기도를 한다.

하루 길을 걸으며 한 사람을 위한 기도를 드리기로.

BJ. 조그만 성당에서 기도하다. 깔끔하게 치료가 잘 되고 건강이 회복되기를, 치료의 모든 과정을 돌보시길, 학교로 돌아가 행복한 교사로 잘 지낼 수 있기를.


3코스 온평포구~표선해수욕장 14.6km


이전에 걸었던 내륙 A코스 말고 바닷길을 따라서 B코스로 걷는다.

예보는 구름이라 했는데, 오늘도 결국 햇볕 쨍쨍이다. 바로 위에서 쏟아지는 강렬한 햇살은 얼굴을 다 가리게 만든다. 그러나 바람 불어 좋은 날, 오늘은 바다를 바라보며 빠른 걸음으로 걷기로 한다.


‘신산리 마을 카페’, 마을 주민들이 운영하는 카페에서 중간스탬프를 찍고, 녹차아이스크림을 진하게 먹다. 이런 맛난 거 처음이야... 그리고 계속 바닷길, 하염없이 펼쳐진 길을 하염없이 걷다. 그러다 갑자기 나타난 푸른 초원! ‘신풍 신천 바다 목장’이다. 소들이 노니는 곳, 그들이 하는 일은 풀 잘 뜯고 잘 놀면 되는 것일까. 점잖은 개 한 마리가 어슬렁 거리며 있다. 커다란 소들을 지키는 개인가 보다.


산티아고 가는 길에는 바다가 없다. 올레길과 다른 점이다.

그런데 여기, 왼쪽에 끝없이 펼쳐진 새파란 바다를 보며 너른 초원에 난 길을 걷는데, 문득 산티아고를 걷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다. 그 길을 걸을 때 그랬다. 가슴 뻥 뚫리는 자유로움! 푸른 길 위에 선 사람들의 풍경이, 온몸으로 바람을 맞으며 걷는 사람들의 마음이 그랬을 것이다.

초원 위에 자리한 카페에 들어가 너른 창을 통해 그 바다와 목장을 본다. 그림이구나.

다시 걷는다. 멀리 표선의 모래사장이 보이고, 거기 밀물일 것이며, 그때 그 얇게 들어온 바닷물과 모래사장을 맨발로 걸을 것, 오늘 길의 하이라이트다.

하아얀(제주의 색깔은 다 이렇게 써야 맞다. 파란이 아니라 너무 파래서 파아란, 너무 하얘서 하아얀...) 모래사장. 파도가 그 위를 넘나들며 무늬를 만들어냈을, 그 파도자국이 고스란히 들여다 보이는 하아얀 모래사장을 걷는다. 발을 담그고 신발을 들고 웃고 뛰며 첨벙댄다. 우리는 나잡아봐라 하며 웃어젖히다 미치는 줄 알았다. 너무 즐거워서... 인간들이 바닷가에서 그렇게 노는 이유를 확실히 알았다. 그냥 까르르한 웃음이 절로 절로 나온다.

이렇게 깨끗하고 얕고 드넓고 평화로운 모래사장이 있을 수 있나. 밀려 들어오는 물이 무섭지 않고 그것을 맞으며 그것과 교감하며 걷는 것. 어서 와, 이런 건 처음이지? 감동이다.


버스에서 곤하게 떨어진다. 숙소로 돌아오니 4시.씻고, 팬플룻 연습도 하고, 저녁 맛있게 먹고, 아시안게임 배드민턴 재미지게 보고, 일기 쓰고 있다. 자면 내일이 오리. 그러면 또 내일의 길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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