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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틀째, 뻐근해온다

수비리/온평 포구

by 순쌤

수비리/온평 포구

론세바예스~수비리 (Zubiri) 20km

아침 6시, 여기저기서 수런거리는 움직임이 느껴진다. 어둡다. 1층 침대에 있던 아저씨가 일찍 출발했나 보다. 부지런하셔라. 거기로 내려가서 짐을 정리한다. 어제 잠은 잔 건지 모르겠다. 어떻게 살아갈지 모르겠다. 가장 기본적인 것만 하고 살지 않을까. 카페에서 식빵 큰 거 하나, 주스, 커피로 아침을 먹는다. 그리고 출발.


걷다가 들어보니 우리가 그나마 여기라도 들어온 게 다행이었단다. 전날 아무 데도 갈 수가 없어 출발점이었던 ‘론세스’로 다시 택시 타고 가서 숙소 바닥에서 간신히 잤다고도 하고, 어떤 젊은이는 징징 짜고 난리도 아니었다고 한다. 주말이어서 사람이 더 많았다고. 불쌍타, 얼마나 기막히고 불안했을까. 내가 그 상황이었다면 절망으로 몸져누웠을 듯하다.


수도원의 푸르스름한 새벽, 성스러운 기운이 감돈다. 어젯밤을 잊고 힘차게 출발한다. 사람들이 저기 길을 걷고 있어 그냥 따라간다. 여기서 배낭을 메고 걷는 사람은 다 목적지가 같을 것이다. 그러니 그냥 따라가면 된다. 너도밤나무 숲길이 나온다. 첫날 나를 홀린 너도밤나무, 아주 친해진 느낌이다. 숲을 지나면 광활한 초원이 나오고, 그리고 오르막에 오르면 어느덧 저 멀리 푸른 초원과 산들이 펼쳐진다. 길들이 이렇게 아름답게 이어져 있구나. 모든 길은 길로 통하는 게 맞다.


중간쯤 카페에서 빵과 커피 한잔 마시고 걷다. 좋아라.

다리 묵직해진다. 어깨도 따가워온다. 짐이 무겁기도 하고 가방이 션찮은 것일 수도 있다. 버릴 짐은 안내책자 하나밖에 없는데, 짐을 맡기고 걸으면 훨씬 가뿐하고 편할 것 같은데 어떻게 할지 고민해 봐야겠다. 오르막 내리막이 있다. 올라갈 때는 아무렇지도 않다. 숨이 차도 그것은 괜찮다. 그러나 내리막은 막 걱정이 된다. 무릎 생각이 난다. 나이가 들었음을 알다. 몸이 먼저 안다. 젊은 아이들은 반대인 듯하다. 올라갈 땐 죽을똥 살똥 하는 것 같은데, 내려갈 땐 거침없이 내려간다.

한국인들이 십여 명 단체로 왔는지 전망 좋은 곳에서 밥을 먹는다. 왠지 반칙인 것도 같고 밥 먹고 싶기도 하고.


수비리 마을로 오다. 그가 사설 알베르게를 예약해 놓았다. 여덟 명이 한 방인데 샤워실 겸 화장실이 하나이다. 그래도 씻는다. 따뜻한 물도 좋다. 수건이 션찮아 머리를 말릴 곳이 없다. 추워진다. 타지에서 추운 것은 위축되고 기분을 주욱 내려가게 만들어서 싫다.

언제까지일까. 오늘 갑자기 자신이 좀 떨어졌다. 겨우 이틀 걷고 말이 되나?


Bar로 저녁을 먹으러 나간다. 비가 잠시 쏟아지다 멈춘다. 바에는 한국어 메뉴가 있다. 소고기와 야채, 감자가 있는 메인요리, 닭고기 ‘빠에야’에다 맥주 2잔!

맥주 한 잔에 가라앉은 기분이 급 업업!! 맛있는 맥주에 변덕 끓는다. 평창올림픽을 봤다고 좋아하는 독일인 부부와 어쩌구저쩌구 같이 앉아 먹는다. 오스트리아청년도 다시 보다. 분명 혼자 왔는데 어떤 여자랑 매우 매우 친하게 대화 나눈다. 첫날 시작을 같이해서인지 만나면 반갑고 오래된 지인 같다. 회복된 맘으로 숙소로 돌아오다. 이제 잠만 자면 된다. 2018. 4.29




2코스 광치기~온평 포구 15.6km


광치기 해변에서 도장 찍고 시작, 식산봉을 넘어와 오조리 마을에서 족지물에 발을 담고 쉰다. 땀이 난 발이 금방 차가워진다. 마을을 돌아보며 걸어 나오는데 참 평화롭고 여유롭다. 정자에 앉아 이야기 나누시는 어르신들의 모습에서도 느꼈다. 오조리마을, 기억해 놔야지!

오늘은 성산일출봉을 사방에서 보며 걷는 길인데, 저것이 새털구름인가, 하늘에 퍼진 게 예술이다.

땅에서는 갈대들이 바람에 온몸을 휘감는 모습이란... 하늘과 땅의 화려한 연출에 걸음을 멈추고 자꾸 사진을 찍는다.


대수산봉으로 가는 길. 오르막에서 숲길로 이어진다. 스틱을 들고 정상까지 오른다. 역시 제주의 바다, 일출봉, 우도, 식산봉, 지미봉, 다랑쉬오름, 용눈이 오름, 한라산, 섭지코지... 이렇게 파노라마 한 바퀴로 다 보인다.

대수산봉, 이 광활한 풍경을 품는 이름으로는 아쉽다.

다시 바꾸길 권함. 그 이름 '큰 물뫼오름'!


배고파라.

보온병에 타온 커피와 바나나, 구운 달걀, 떡, 귤... 이런 점심을 먹는다. 알갱이 커피의 새로운 발견! 얘네들과 딱 어울린다.

든든해진 배와 함께 내려오는 길은 또 아름다운 숲길이다. 아주 천천히 내려온다. 대수산봉을 지나오면 이후는 계속 포장길이다.

아까워서 아주 천천히 두런두런 내려온다.

무엇을 심은 것일까, 검은흙을 가지런히 일군 밭에 줄줄이 심은 것이 조그만 싹을 내놓고 있다. 예뻐라. '신유빈 같다'고 했다. 제주에 올 때 항저우아시안게임을 하고 있었다. 공항에서 신유빈이 하는 탁구를 봤다. 귀여움과 야무짐의 극치. 닮았다.


하염없이 걸어온다. 다리 조금 뻐근해진다. 오늘 햇살이 무지 따끈하다. 많이 더웠다. 혼인지에서 온평포구까지의 1km가 참 길다. 다리는 아직은 괜찮다고 전해온다만, 길다. 고마워요. 2023.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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