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이 가시지 않은 7시출발. 같은 숙소에 묵은 슬로베니아부부, 독일인 둘, 오스트리아 청년 하나도 같이 출발한다. 맘속으로 기도를 드린다. '경건과 숙연함'이저절로다.
안개비 흩날린다. 밤새 천둥번개에 비가 엄청 왔다. 그렇게 내렸으니 이제 걷히는 비 아닐까. 안개비도 상쾌하고 걸음도 상쾌하다. 사람들이 적당히 있어서 길 잃을 염려도 없겠다. 일본인 남자 혼자 씩씩하게 걷는다. 이번이 네 번째 란다. 어디쯤 가면 길이 오르막이고 곧 내리막이고 신나게 설명한다. 먼 나라서 이웃 나라 사람 만나니 반가운 거다. 그나 우리나.
오르막길, 저 앞에서 안개가 오락가락한다.
자욱하다가 걷히다가...
피레네 산맥을 넘어가는 길에는 온통 너도밤나무다. 안갯속에 줄지어선 연초록의 나무들이 연한 수채화 같다. 비에 젖은 낙엽이 수북이 쌓인 길이 이어진다. 길이 이렇게 아름다울 줄 몰랐다. 어느 책에서도 이렇게 아름다운 피레네 산맥 넘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힘든 이야기만 읽은 것 같은데 뭐지?
속도가 나쁘지 않다. 중간중간 빵도 먹고 과일도 먹고, 다리가 좀 무겁긴 하지만 괜찮다.
드디어 저어기 론세바예스 수도원이 보인다. 중세를 다룬 영화에 나올 법한 커다란 수도원이 위엄 있게 나타난다. 사람들이 벌써 줄을 길게 서있다. 2시 45분, 우리도 일찍 도착한 편인데... 약 2시간 접수 시작하길 기다린다. 신부님이 몇 번 나오더니 우리부터 뒤쪽을 불안하게 쳐다본다. 자리가 없을 것 같으니 다른 곳을 찾아보는 게 낫겠다는 몸짓.... 이런... 그러나 기다려보기로 한다.
들어간다! 단, 접수대에서 도장 꽝 찍는데 우리 앞 팀부터는 구관으로 가야 한단다. 깔끔한 신관은 다 찼다고, 괜찮겠냐고. 당근! 오늘더 이상 못 걸어요!
우리를 구불구불 한참 데리고 가다 아주 오래된 듯한 건물 앞에 멈춘다.오, 중세 수도원답다. 좁은 공간에 이층 침대 몇 개가놓여 있는 으슬거리고 어둑신한 방.
아, 뭔가 막 불안하고 기운이 가라앉는다.
열여섯 명이 정원인 방에 우리는 2층 침대에 배정된다. 침낭을 꺼내고 주섬주섬 짐도 꺼낸다. 아주 좁고 어두운 샤워실 두 곳, 급 우울해진다. 그래도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고 나오니 그럭저럭 살 것 같다. 경험자들이 한 말도 그거였다. 그럭저럭 살 것 같다고...
저녁은 7시. 많은 순례자들이 식당 안으로 차곡차곡 들여보내지고 순서대로 예닐곱씩 한 식탁에 둘러앉게 되다. 순례자를 위한 정식 '메뉴델디아'로, 닭백숙이나 물고기 요리가 메인으로 나온다. 몸이 맛을 거부하다. 요리를 먹는데 고달프고 통증이 느껴와 앉아있기가 힘들다.
2층 침대 한 칸, 침낭 안에서 밤새 끙끙 앓다. 열여섯 명의 곤고한 사람들의 소리, 불이 일찍 나가버려 캄캄한 곳에서 사람들 불편하게 오가는 소리, 코 고는 소리...
처음 쓰는 침낭은 안이 미끄럽고 좁아 정말 이 몸을 어디에 어떻게 간수해야 할지 모르겠다. 약을 하나 먹고 눕다. 걷기 첫날부터 대략 난감이다. 잠을 잘 수나 있는 건지 모르겠다.
1-1 코스 우도 11.3km
이번에는 수첩에 스탬프를 찍고 다닌다.
한 달 동안 매일 걸으며 완주할 계획이고 인증서도 받을 예정이니까.
까미노 걸을 때 도착지 알베르게에서 도장받고 묵던 것처럼, 그것으로 완주 인증받는 것처럼 말이다.
제주 올레를 자유롭게 걸으며 완주하는 것과 도장을 찍으며 완주하고 공식적으로 인증받는 것이 느낌이 좀 다를까? 그것이 궁금하다...
성산항 10시 30분 출발, 우도 천진항으로 향한다. 바로 앞 가까이 있는 섬엘 가는데도, 이 배를 타면 색다른 여행 기분이 든다. 섬 속의 섬을 가는 길이 심정적으로 더 멀 수도 있겠다.
날은 종일 흐리다 했고, 간혹 비가 흩뿌릴 수도 있다 했다. 걷기에는 딱 좋은 날씨겠으나 우도봉에서 바라보던 그 새파란 하늘은 아니 되겠구나.
첫날 아름다운 우도를 와서 좋다. 10월인데 밭은 온통 푸르다. 땅콩이란다. 검은 화산돌담 안의 싱그런 푸른 잎들이 육지와 다른 제주를 제대로 보여준다. 근데 땅콩이 어디로 나오는 건지 모르겠다. 열매처럼 나중에열리는 건지 가지에서 바로 뻗어 나오는 건지. 검은 돌담 사이에 한 묶음 뽑혀 나온 것이 보인다. 뿌리에 땅콩이 주렁주렁 달려있다. 아, 그렇구나. 그 뿌리에서 우도 땅콩과 땅콩 막걸리가 나오는구나.
우리는 아주 잘 걷는다.
홍조단괴해수욕장! 산호해수욕장이던 것이 그 어려운 이름으로 바뀌었단다. 산호가 부서져 해안을 이룬 줄 알았는데, 산호가 아니라 홍조단괴였다고. 팝콘처럼 생긴 둥근돌들을 이름이다. 물은 옥색의 산호색....
맨발로 걷기로 한다. 맨발 걷기에 빠져있는 터라 이런 해변을 만난 것이 신난다. 성산일출봉을 배경으로 뻗어 있는 해변 끝까지 걷는다. 등산화를 벗어 들고 물속으로 들어간다. 시원해라. 파도가 몰아쳐 와도 좋고 젖어도 좋다. 아무 거칠 것이 없구나.
우도봉 밑 검멀레 해변을 앞에 두고 잠시 아이스크림과 함께 휴식. 강아지 모양으로 만들어준 것을 '귀여워서 어찌 먹누' 하며 받아 들고 의자에 앉아 신나게 먹는데, 참 많은 사람들이 즐거워하며 아이스크림을 받고 있다. 저 주인아저씨는 돈도 벌면서 좋은 일 하시네. 저런 일이 좋은 직업인데, 당신은 아시려나... 여기는 관광지 맞다. 시끌벅적하다.
우도봉으로 오른다. 구름이 파도처럼 짙게 깔려 있고, 가파른 오르막길에는 억새가 피어나기 시작했다. 숨이 가빠 오른 길 뒤돌아보면 색색의 지붕들이 땅과 딱 붙어 있다. 봄에 저기 유채꽃이 어우러졌을 때 환상이었지.
그리고 멋진 등대! 그 앞에 설문대할망이 당당히! 불어오는 바람, 우도를 둘러싼 새파란 바다... 아, 찬란하다. 넓은 벌판에 말들이 어슬렁거리고, 억새 일렁이는 길을 내려오는데 우린 참 자유롭구나.
훈데르트 바서의 공원을 잠시 들른다. 입구에는 "당신은 자연의 손님입니다."라는 문구, 맞는 말씀. 우도 관광을 가면 꼭 들르자고 한 곳인데, 올레길을 걸을 때 그 미술관을 구경하는 것이 쉽지 않다. 여유 있게 쉼을 할 때 그의 부드러운 공간과 만나길 기대하며, 천진항에서 배를 타고 돌아오다. 주차장에는 우리를 숙소로 데려다줄 버스가 대기하고 있다. 너무 편안한 걷기 여행이로고.
저녁 식사 후, 마트로 가서 우도땅콩막걸리와 와인 두 병과 알맹이 커피를 사들고 온다. 낮엔 따갑더니 저녁 바람이 어찌 그리 가을가을한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