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7시 20분, 산뜻한 출발. 팜플로나가 도시라고 하는데 사실 그런 깔끔한 도시는 괜찮다. 번잡하지 않다. 오늘 길은 처음부터 감동이다. 대학을 지나오는 길, 기분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Navarra대학. 단정하고 조용하고 넓고 쾌적한, 공부가 저절로 될 것 같은 캠퍼스, 여기 다니는 젊은이들의 인격 수양은 저절로 되지 않을까 싶은 인간적인 공간과 환경이다. 대학을 벗어나니 시민들이 이용하는 공원에 만들어진 정갈한 길이 이어진다. 그리고 보리인지 밀인지가 심어진 끝없는 평원이 나오고. 아름답다.
오르막도 이어진다. 정상에 다다르자 다양한 순례자 모양을 철로 만들어놓은 조각들이 있다. 책에서 봤던 작품들이어서 반갑다. 앉아서 숨을 돌리는데, 이정표가 있다. 이곳에서의 거리들이 표시되어 있는데 서울이 약 9,700km, 산티아고가 700여 km 거리에 있단다. 서울 멀다. 그렇지 산티아고가 금방이네. 가자.
이제 내리막길, 또 길다운 길이 펼쳐져 있다. 햇살이 따듯하고도 시원하다. 선글라스를 처음으로 꺼내 쓴다. 날씨가 이렇게 상쾌할 수가 없다. 끝없이 펼쳐진 푸른 초원을 보며, "우리 이렇게 좋은 공기 마시고, 온통 푸른색 천지를 보며 온몸으로 걷는데, 너무 오래 살게 되는 거 아닐까?" 걱정인지 감탄인지를 한다.
그러다 저기 푸른 밭에 아담한 텐트 하나 보다. 순례자라는 표시의 조개껍데기 내 걸어놓고 평화롭게 잠들어 있을, 저 안의 사람은 누구일까. 내가 아무리 신선놀음한다한들, 저게 진짜이다. 인정.
사람들은 왜 걸을까. 다들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난 이 길이 좋다. 걸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좋다. 온몸에 진이 다 빠져 더 이상 움직일 수 없는 지경이었다가도 아침이면 다시 가뿐한 몸뚱이를 만나게 되는 이것은 무엇인가. 인간의 몸이 신비하다.
수행이나 종교적 의미로 걷는 사람도 많다. 짐을 지고 30여 일을 걷는다는 것이 쉽지 않을 게다. 그러나 수행을 하거나 종교적 목적으로 걷는다 해도 이 풍경, 이 풍경이 너무 아름답게 보일 것은 확실하다.
오늘은 W부부를 위해 기도한다. 그들이 간절히 원하는 바를 안다. 주님의 뜻이 뭔지 모르지만, 그들 위에 선하게 펼쳐져, 가능하면 어떤 방식으로든 해답을 주시길.
4코스 표선~남원포구 19km
10시 출발, 긴 길이다. 오늘도 바다를 보며 걷는 길이 많다.
구름이 짙다가 해가 그 사이로 삐져나오다가 바람이 시원하다가 멈추다가 이렇게 다양하다.
표선에서 시작하는 길은 화산석이 흩어진 길이라 힘들었던 기억이 있는데 오늘은 걸을 만하다. 상쾌하다. 우린 일행들 다 보내고 둘이 맨 뒤에서 걷기로 한다. 그런데 길을 걷다 보면 그들과 나란히 하다가 앞지르게 되고 걸음을 빨리 하게 된다. 낯선 이들과 지나가면서 눈인사 정도만 나누기. 그러다 사람들과 떨어져 우리끼리 앞에서 걷게 되고, 그렇게 둘이 걷게 되고. 이것이 자연스럽고 편하다.
해병대 길도 지나고 소노캄 호텔의 하트 모양으로 가지를 잘라놓은 나무 아래서 사진도 찍고, 그리고 ‘알토산 고팡’이라는 곳에서 문어라면도 제일 먼저 시켜 먹고 나온다. 사람들 와서 기다릴 때 우리는 인사하며 걸어 나온다.
토산마을, 신흥리마을 밭에는 온통 귤나무다. 거기 귤이 주렁주렁 달린 것이 노란 귤이 아니라 푸른 청귤이다. 알토산 고팡에서 먹은 청귤에이드가 참 맛있었는데 우리가 아는 노란 귤과 종자가 다른 건지, 노랗게 익기 전의 그 청귤을 가지고 청을 담는 건지 모르겠다. 물어볼 사람이 없네.
남원으로 들어오는 바닷가에는 토종 무궁화라는 ‘황근’이 지천으로 심어져 있다. 대부분 봉오리를 다물고 있거나 조금 열린 틈 가운데 간혹 한 송이 아주 어여쁘게 피어있다. 연한 노란 꽃잎 속에 그 짙은 자줏빛의 강렬한 꽃술이라니... 멸종 위기인 것을 애쓴 끝에 복원해 놓았고, 7,8월에 개화한다고 안내판에 쓰여있는데, 지금 10월인데 다 지고 늦게 핀 몇 송이인가, 이제 피는 건가? 이것도 물어볼 사람이 없네.
나이가 들면서 생긴 버릇 중 하나. 걸으면서 보는 나무나 꽃이나 풀이나 열매나... 이들에게 진심이라는 것, 이름이 궁금하고 그들이 사는 모습이 궁금하고. 워낙 분별 못하는 무지한 분야이기도 하고, 젊은 날엔 일도 관심 없었던 것인데 말이다. 이것은 또 왜일까?
오늘은 다리가 묵직하다. 뒤에서 부지런히 쫓아온 사람이 우리 보고 치타 같다고 한다. 너무 빨리 걸었나 보다. 숙소에 도착 후 샤워하고 바로 캔 맥주 한 개씩 딴다. 아시안게임 안세영 배드민턴을 하는 날이다. 이것을 보려 그렇게 달렸나? 맥주를 마시면서 TV속으로 들어갈 뻔했다. 역시 안세영! 내가 하루 최선으로 걸은 만큼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다. 신난다. 이런 덤이 있나.
경기도 보고 저녁까지 먹었는데 7시도 안 됐다. 몸이 늘어지고 노곤하고 자고 싶다. 그러나 벌써 자면 어찌 되나. 새벽에 눈 말똥거리고 살아나면 안 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