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의 눈물은 차갑구나.

한강, <소년이 온다>

by 이호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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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3일 밤이 지나고 며칠 뒤 이 책을 펼쳤습니다. 흔들리는 지하철에서 중심을 잡아가며 한 장 한 장 넘기던 감정이 선명히 남아 있습니다. 물론 이 여운은 작가의 문장이 만들어준 것이겠죠. 그중에서도 소설 앞부분에서 등장인물 동호가 속으로 하는 말이 유난히 강렬했습니다. 소설을 전부 읽고 나서 세 가지 소재로 감상문을 남겨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공교롭게도 그 소재들이 그 한 문장에 담겨 있더군요. 옳다구나, 지금 쓰고 있는 글의 제목으로 삼았습니다.











혼 - 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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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이 온다>는 여섯 개의 장과 에필로그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중 2장은 혼의 시점에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다른 장에서도 혼이라는 단어가 꽤 많이 나옵니다. 군에 맞서 저항하던 한 남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먼저 가신 혼들이 눈을 뜨고 우릴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러자 동호는 속으로 생각합니다. "혼한테는 몸이 없는데, 어떻게 눈을 뜨고 우릴 지켜볼까."

혼을 받치다, 혼은 팔지 않는다, 혼을 달래야 한다... 혼은 대개 우리가 볼 수 없고 만질 수 없는, 그러면서도 생명과 인간성을 상징하는 존재로 그려집니다. 죽음을 다룰 때면 '한'을 표현하는 장치가 되곤 하죠. 이 책에서도 한 맺힘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저는 그보다 혼이라는 단어에 몸이라는 단어가 따라붙는다고 느꼈습니다. 혼과 몸이 분리되는 동시에 연결되는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혼이라는 단어를 정신, 이성, 생각, 감정 등으로 바꿔서 배치를 해볼 수도 있겠습니다. 무엇이 어떤 방식으로 더 강한가에 대해서는 보다 깊은 논의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인지과학, 생물학 등 여러 분야의 연구로 이에 대한 지식을 쌓아가고 있으니까요. 한 인지심리학자는 정신력으로 이겨내라는 말을 제발 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하더군요. 정신력이라는 것도 체력이 받쳐줄 때 발휘할 수 있다는 거죠. 부정적인 생각이 몸을 아프게 하고, 꾸준한 운동이 정신을 맑게 해주는 현상은 '생각-몸-감정'이 서로 상호작용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책을 읽는 동안에도 이런 경험이 가능합니다. 자국민을 죽이는 군인이 등장할 때마다, 시민을 고문하는 경찰이 나타날 때마다, 무서웠습니다. 책을 넘기는 손이 떨리더군요. 그리고 그런 제 손이 보일 때 더 무서웠습니다. 더 무서워지니 손이 더 떨렸습니다.

'자유'라는 단어와 연결 지어 생각해 봐도 혼과 몸을 흥미롭게 읽을 수 있습니다. 이 책에서는 몸이라는 직접적인 단어보다는 몸을 표현하는 요소가 여럿 등장하는데, 다소 잔혹합니다. 시신, 피, 진물, 뼈, 수치스러운 배고픔과 허기... 등장인물들은 자신의 몸으로 부끄러움과 고통을 느끼고 이제 그만 편안해지고 싶은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혼이 몸을 벗어날 때(죽음을 맞이할 때) 비로소 자유로워진다는 관용어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수감되어 고문당하는 등장인물이 "내 몸이 내 것이 아니라는 걸", "내 삶의 어떤 것도 내 뜻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이라고 말하는 문장은 몸이야말로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자유, 선택권, 삶을 드러냅니다. 몸이 고통이자 수치라는 점을 잔혹하게 그리는 문장들은 오히려 몸이 왜 중요한지를 말해줍니다. 물리적 폭력과 강제력이 주는 공포는 사상, 제도, 문화로 이루어진 사회에서 몸의 필연성을 보여주는 요소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차가움 - 따뜻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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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에서 찾기 쉬운 배치 중 하나가 대립하는 요소들입니다. 소년을 관통한 총알은 "차디찬 몽둥이" 같았다가 "뱃속을 휘젓는 불덩어리"가 됩니다. 그것은 "따뜻한 피"를 흘러나가게 했고, 그 시작은 "차디찬 방아쇠"입니다. 그리고 그 방아쇠를 당긴 것은 "따뜻한 손가락"이었습니다.

차가운 것은 '악', 따뜻한 것은 '선'이라고 단순하게 나누어지진 않습니다. 무엇이든 순간마다 온도는 변할 수 있고, 차가운 것에도 열이 전도되고, 따뜻하던 것도 식을 수 있습니다. 열이 지나치게 낮아도 생명이 살 수 없지만 그 반대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우리는 사람이라는 존재를 표현할 때 보편적인 언어적 감성을 공유합니다. 차갑다는 단어는 보통 부정적으로, 따뜻하다는 말은 긍정적으로 쓰이죠. 특히 따뜻하다는 단어는 홀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혼자 냉철하게 판단할 수도 있고, 혼자 뜨거운 열정을 쏟을 수도 있지만, 혼자 따뜻하지는 않습니다. 차가움과 뜨거움은 특정한 성과를 향한 반면, 따뜻함은 관계를 향합니다. 그렇기에 이 책에 등장하는 따뜻함은 참혹합니다. 온기를 만들어낼 수 있는 존재가 바로 방아쇠를 당긴 손가락이었으니까요.

그 외에도 '숭고'와 '야만', '잔인함'과 '(잔인함에 대항하는) 소극성' 등 단순하지 않게 대립하는 요소들이 등장합니다. 출판물이 검열당하는 시기, 출판사 직원이 된 등장인물은 한 번역본의 서문을 읽습니다. "개개인의 도덕적 수준과 별개로 특정한 윤리적 파동"이 있다, 즉 인간은 근본적인 숭고함과 야만을 갖고 있고, 군중의 힘을 빌려 둘 중 하나가 극대화되어 발현되는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주변 환경에 영향을 받아 대립하는 성질들 중 하나가 발현된다는 주장은 꽤나 일리가 있어 보입니다(물론 '숭고함과 야만이 정말로 대립적인가?'라는 질문도 던질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같은 환경에서 다른 성질이 발현되는 경우도 있죠. "특별히 잔인한 군인들이 있었던 것처럼, 특별히 소극적인 군인들이 있었다. (...) 집단발포 명령이 떨어졌을 때, 사람을 맞히지 않기 위해 총신을 올려 쏜 병사들이 있었다."라는 문장은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폭력'과 '폭력에 맞선 저항'은 내 안에 얼마만큼 자라나고 있을까요? 그것들은 어떤 상황에서 얼마만큼 발현하게 될까요?




• 분수 -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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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역시 많이 등장합니다. 과연 언제 물을 뿜고 언제 조용히 있는지, 비, 눈물, 땀, 피라는 단어가 이 분수에 어떻게 따라붙는지 살펴보는 것도 이 책을 읽는 재미 중 하나입니다.

분수는 무더운 날 우리를 시원하게 해 줍니다. 즐거움, 축제 같은 단어와도 잘 어울리죠. 반대로 비는 흐린 날씨를 만들기 때문에 대다수의 이야기에서 절망이나 슬픔을 나타내는 소재입니다. 동호는 다가올 학살을 앞두고 내리는 비를 맞으며 생각합니다. '혼의 눈물은 차갑구나.' 마지막까지 도청에서 저항하던 시민들의 주검과 몸을 군인들이 끌고 나왔을 때, "그 오전 분수대에서는 물줄기가 뿜어져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학살 이후 "유월의 분수대가 눈부신 물줄기를 뿜었"고, 살아남은 한 인물은 도청 민원실에 전화를 겁니다. "어떻게 벌써 분수대에서 물이 나옵니까. 무슨 축제라고 물이 나옵니까. 얼마나 됐다고, 어떻게 벌써 그럴 수 있습니까." 이 인물은 이후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다.'라는, 많은 분들께 인상 깊게 다가왔을 문장을 남기죠. 그 문장들 중에서도 분수가 나옵니다. '용서할 수 없는 물줄기가 번쩍이며 분수대에서 뿜어져 나온 뒤에. 어디서나 사원의 불빛이 타고 있었다.'

분수와 비라는 단어를 묶어 이런 질문도 해볼 수 있겠죠. 중력을 거스르는가, 혹은 중력을 따르는가? 인간이 가만히 있어도 아래로 내리는 비와 달리, 분수대에서 뿜어져 올라가는 물을 만들기 위해서는 인간이 그만한 공을 들여야 합니다. 비와 비교하면 부자연스럽죠. 절망과 슬픔은 언제든 쉽게 찾아올 수 있지만 즐거움과 축제는 어렵게 만들어야만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래서 물을 위로 뿜었던 유월의 분수대는 더 비참합니다. 사람들의 죽음과 그 슬픔을 외면하기 위해 인간의 힘을 쏟은 물체이기 때문입니다.

당시 시민군의 목표는 "수십만의 시민이 분수대 앞으로 모일 때까지만" 버티는 것이었습니다. 시민들이 한 뜻으로 몸을 모으는 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니라면, 우리는 사회의 분수대를 가꿔야 합니다. 그곳에서 서로의 따뜻함을 느끼고, 부자연스럽게 위로 솟는 시원한 물줄기를 즐기고, 때로는 눈물과 땀이 같이 흐르게 두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만 솟아오르고 내리고 흐르는 모든 것들이 윤리적 파동을 만들어낼 수 있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