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레어 키건, <맡겨진 소녀>
소설을 읽는 방법은 여기저기서 소개되지만 자신에게 맞는 방법을 찾기는 쉽지 않습니다. 특히 문학으로 공부를 하고 싶은 사람에게는 더더욱 그렇겠죠. 저 역시 '재밌다' 혹은 '별로다'라는 느낌으로 책을 덮는 것이 아쉬웠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저에게 저자 클레어 키건이 힌트 하나를 주더군요. 암시를 중시하는 저자의 <이처럼 사소한 것들>을 읽고 난 뒤, 소설을 읽으며 '단어로 상상하는 일'에 재미를 붙이기 시작한 겁니다. 여러분도 이 책을 읽고, 의미를 부여한 자신만의 단어를 수집해 보면 어떨지요.
소녀가 친척인 킨셀라 부부에게 맡겨진 첫날, 아주머니는 소녀를 데리고 집 근처 우물로 갑니다. 그러고는 아이에게 물을 마셔보라고 권합니다. "물은 정말 시원하고 깨끗하다. 아빠가 떠난 맛, (...) 아빠가 가고 아무것도 남지 않은 맛이다." 시원함은 적당한 차가움과 함께 후련함도 담고 있습니다. 어쩌면 다정함과 여유가 없는 집에서 자랐던 소녀에게 가정(혈연관계와 집)은 우물일 수도 있습니다. 깊이 빠져버리면 빠져나오기 힘든, 관계가 갖는 속박인 것이죠. 아주머니는 소녀가 머그잔으로 물을 뜨는 동안 뒤에서 벨트를 잡아줍니다. "생각보다 깊어.", "조심해." 소설의 마지막 장, 킨셀라 부부와 헤어지는 순간 소녀는, 집으로 돌아가는 것은 물에 빠지는 것과 같다고 느낍니다. "나는 손을 놓으면 물에 빠지기라도 할 것처럼 아저씨를 꼭 붙든 채 (...)"
그런데 한 사람이 집과 맺는 관계는 복잡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물을 채우고 있는 물은 흔히 생명의 근원이라고 불립니다. 한 개체의 생존을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물질이죠. 한편, 빠지면 위험하지만 떠마실 수는 있어야 하는 정도의 관계 역시 우리를 살아 있게 해 줍니다. 소녀 역시 관계를 생각합니다. 아주머니의 한 손을 잡은 자신의 손이, 물을 채운 양동이를 반대편 손에 든 아주머니의 균형을 잡아주고 있다고 여깁니다(손을 잡는 모습은 아저씨와 맺는 관계에서도 중요한 요소입니다).
소녀는 킨셀라 부부네서 지내며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자 하는 마음을 갖습니다. 부모님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 다가오자, 소녀는 아주머니가 일을 마치고 돌아와 차를 마실 수 있도록 양동이를 들고 우물로 가죠. 이처럼 양동이는 아주머니와 소녀를 이어주는 역할을 합니다. 안타깝게도 우물에서 물을 떠 오지는 못합니다. 아직 '물'의 무게를 견디기에는, 혼자서 물을 떠오기에는 힘이 부족했나 봅니다.
소녀도 처음에는 킨셀라 부부(정확히 말하면 킨셀라 아주머니)가 다른 사람들이랑 똑같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사람들 사이에는 아주 커다란 차이가 있다."라고 결론을 내리죠. 그 차이를 보여주는 요소들 중 하나가 바로 걷는 속도입니다. 마을 사람 중 하나인 밀드러드 아주머니는 "내가 겨우 따라잡을 만한 속도로 성큼성큼 걸어가"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이후 킨셀라 아저씨와 비교 대상이 됩니다. "아저씨는 내가 발을 맞춰 걸을 수 있도록 보폭을 줄인다."
걸음 속도를 늦춰야 나란히 갈 수 있다는 원리는 글을 읽는 공부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소녀의 책 읽기를 도와주는 아저씨의 방식은 느리게 기다려주는 것이 왜 필요한지를 보여줍니다. "(...) 아저씨가 단어를 하나하나 손톱으로 짚으면서 내가 짐작해서 맞히거나 비슷하게 맞힐 때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려주었다." 아이의 시선과 입장에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어야 가능한 일이겠죠.
반면 달리는 행위는 보폭을 늦춰주는 느린 걸음과 상반됩니다. 그럼에도 아저씨는 소녀를 맡은 둘째 날부터, 우체통까지 달려갔다 오는 과제를 줍니다. "우편함. 저기 가면 보일 거야. 최대한 빨리 달리는 거다."라고 말합니다. 우편물을 가지고 돌아오는 데 걸리는 시간도 잽니다. 무엇이든 천천히, 서두르지 않는 킨셀라 부부의 모습들 중에서 유일하게 소녀가 무언가를 빨리 하게 만드는 일이죠.
이 소설을 읽은 분들은 모두 동의하실 겁니다. 달리기는 킨셀라 부부의 흠이 아니라 이들과 소녀를 이어주는 사랑을 상징한다는 것을요. 낯선 환경, 낯선 사람, 낯선 일상을 마주하게 된 아이가 모든 생각을 접어두고 몰입할 수 있는 순간은 숨이 차게 달리는 일이었을 겁니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현관 앞 계단을 출발대 삼아 자세를 취한다."라고 할 정도로 소녀는 우체통까지 달려갔다 오는 순간을 즐깁니다. 아저씨가 우편물을 가져오라고 시키기를 기다리기까지 하죠. 그리고 마지막 순간, 그렇게 단련한 달리기 실력을 발휘합니다. "(...) 어느새 나는 내가 제일 잘하는 일을 하고 있다. (...) 지금 나에게 중요한 것은 딱 하나밖에 없고, 내 발이 나를 그곳으로 데려간다. (...) 나는 망설임 없이 아저씨를 향해 계속 달려가고, 그 앞에 도착하자 대문이 활짝 열리고 아저씨의 품에 부딪힌다."
"나는 내 집에서의 내 삶과 여기에서의 내 삶의 차이를 가만히 내버려 둔다." 소녀는 "이 편안함이 끝나기를"이라는 마음을 가질 정도로 킨셀라 부부의 다정함을 어색해합니다. 아마도 원래 집에서와는 너무나 다른 분위기와 생활을 마주했기 때문이겠죠. 그렇다면 킨셀라 부부네가 가난했다면 어땠을까요?
이 소설에서 부모님은 소녀에게 다정하지 않으며─목욕물을 다시 사용할 정도로─궁핍합니다. 킨셀라 부부네는 소녀에게 다정하면서 경제적으로 여유롭습니다. 소녀는 킨셀라 부부네서 따뜻한 관계적 충족과 더불어 따뜻한 목욕물, 깨끗한 옷, 서점에서 산 책 등 물질적 충족을 모두 경험합니다. 친절하지만 가난하고 바빴다면, 과연 그곳이 소녀를 위한 환경이 될 수 있었을지 생각해 보게 만들죠. 이런 점에서 이 소설은 아이를 위하는 것이 단순히 마음만으로는 어려울 수 있다는 목소리를 은은하게 들려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