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식, <회색 인간>
<회색 인간>에 실린 단편 중 하나인 「무인도의 부자 노인」은 제가 어렸을 때부터 품어온 두 가지 의문을 떠올리게 합니다. 하나는 '화폐'입니다. 잉크가 새겨진 종이와 은행 계좌에 입력된 숫자들이 우리의 삶을 좌지우지한다는 게, 어린 시절 저에게는 충격적이었거든요(물론 지금도 신기해합니다). 사람들에게 돈은 생존하기 위한 도구만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그것이 실재할 거라고 믿은 채 때로는 인격으로, 때로는 능력으로, 때로는 희망으로 여깁니다.
무인도에 고립된 소설 속 인물들에게 그 희망이 바로 돈이었습니다. 이들은 무인도 바깥 사회에서 가지고 있던 "재산"을 "노트"에 적기 시작합니다. 그러고는 숫자를 늘리거나 줄이면서 서로의 노동과 상품을 사고팔죠. 그렇게 그들은 노트 하나로 시장경제 체제를 갖춘 사회를 만듭니다. "그들에게 그 재산은, 마치 사회와 무인도를 연결해 주는 현실의 끈처럼 느껴졌"고, "모두 돈을 벌기 위해 무언가를 했"습니다. 누군가 물고기를 사냥하고, 누군가는 집을 짓고, 누군가는 풀잎 모자를 만들고, 누군가는 소설을 썼습니다. 현실에서도 우리는 손에 만져지거나 만져지지 않는 무언가를 생산하고, 그 상품을 운반하고, 그 외에 다양한 방식의 서비스를 제공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행위의 공통점은 돈이라는 도구로 값어치가 매겨진다는 것입니다.
이 현상은 제가 품어온 또 다른 의문, '누가 무슨 일을 해야 하는가'로 이어집니다. "노트"라는 경제 시스템을 도입한 최초의 인물인 부자 노인은 사람들이 제공하는 노동은 당연한 것이 아니며 "정당한 대가"가 주어져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문제는 정당한 정도가 과연 어느 정도인지 판단하기가 어렵다는 거겠죠. 물고기를 사냥해서 먹을거리를 구하는 사람이 있고, 풀잎을 엮어 모자를 만드는 사람이 있다면, 누구에게 얼마만큼의 대가를 지불하는 것이 정당할까요? 이는 우리가 우리 주변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각각의 노동을 바라보는 시선 또한 생각해 보게 만듭니다. 물론 수요와 공급이라는 경제학의 개념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이 개념만 있으면, 예쁜 풀잎 모자나 감동적인 소설 따위가 무인도에서 생존하는 데 무슨 쓸모가 있느냐고 말하는 사람에게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돈을 낼 사람이 있으면 그게 무엇이든 만들어서 팔면 됩니다.'라고 말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보편적으로 동의하는 이상적인 삶의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돈이 곧 성공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겠으나) 주체적이고, 즐겁고, 자신을 계발하는 삶을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그리고 이러한 이상에는 언제나 예술이 존재합니다. 저자는 「무인도의 부자 노인」뿐만 아니라 「회색 인간」, 「어디까지 인간으로 볼 것인가」라는 단편에서도 "노래"라는 요소를 통해 '예술이 가능한 시점은 언제인가?'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그리고 그 질문을 따라가다 보면, 풀잎으로 엮은 모자가 장부에 기록되는 숫자를 넘어 '인간다움'으로 나아간다는 점도 발견하게 되죠.
앞에서 이상적인 삶의 모습을 나열할 때 한 가지를 빼먹었네요. 함께 사는 것, 바로 '사회'입니다. <회색 인간>에 나오는 단편들을 읽다 보면 저자가 "인류"나 "사람들"처럼 크고 작은 집단에 관심을 갖고 있다고 느껴집니다. 같이 살아가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고민한 흔적이 보인다고나 할까요?
그중에서도 「사망공동체」는 '무작위'라는 도구로 더 나은 삶에 대해 얘기합니다. 누군가가 죽으면 무작위로 또 다른 한 사람이 따라 죽게 되는 일이 벌어지면서, 사람들은 사회안전망을 필사적으로 구축하기 시작합니다. 사형 집행, 전쟁, 제3세계 기아, 노숙인, 청년 자살, 학교 폭력, 노인 복지, 치안, 산업 안전, 음주운전... "사망률"을 낮추기 위해 사회를 재편하죠. 이익과 손해, 나의 일과 남의 일을 본능적으로 구분해서 행동하는 인간이 평등을 실천하는 건 무작위가 주는 불가항력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물론 그것이 더 나은 사회를 위한 완벽한 도구는 아닐 겁니다. 무작위에 대한 두려움과 저항을 다루고 있는 「신의 소원」과 비교해 봐도 재미있을 것 같군요).
뒤집어 생각하면, 「사망공동체」는 현 사회가 사회안전망을 우선순위에 두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줍니다. 그리고 그 우선순위에는 「흐르는 물이 되어」에서 나오듯 "최고의 능률"과 "더 가치 있는 존재"(여기서 말하는 가치는 '생산성'이지 않을까 싶네요)가 들어가 있습니다.
「흐르는 물이 되어」는 어느 날 개발된 "정화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정화수 캡슐에 몸을 담그면 몸이 사라졌다가 한 시간 후 다시 돌아오는데, 이 현상을 겪으면 최상의 컨디션으로 "충전"됩니다. "피로", "피곤", "잠으로 낭비하는 시간", "쉼" 같은 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죠. "부작용"에 대한 "불안감"은 "활용도"와 "국가 경쟁력", "대중화"에 의해 묵살당합니다.
결국 과부하된 정화수 공장들은 폭발하면서 연기를 피워 올립니다. 상승하는 연기가 품은 열기는 그동안 이야기 속에서 이루어 낸 산업, 문화, 과학을 비롯한 모든 분야의 폭발적인 성장을 떠올리게 합니다. 반대로 그 열기의 근원을 품고 하강하는 비는 세상을 깨끗하게 "정화"합니다. 생산하지 않는 시간을 불순한 대상으로 여기고 이를 정화하려 했지만, 인간은 없고 시간만 남은 것이죠. 경우에 따라서 상승은 모두를 위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다만 계속해서 질문을 던지면 좋겠습니다. 우리 사회가 무엇을 태워서 상승시키고 있는지, 어떤 잔해를 만들어내고 있는지를 말이죠. 그것이 같이 살아가고 있지만 홀로 죽어가고 있는 사람들인지, 탑승하지 못한 낙오자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