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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롭 Mar 19. 2023

신이 있다고 생각하세요?

한 방울 물방울 같은 기도 2

여름밤 고요한 제천 시내를 걸어 그녀의 집으로 갈 때 물어보았다. 어떻게 낯선 사람을 집에서 재울 마음을 내었는지.


“언니를 믿으니까요.”


그녀는 편의점 여사님을 언니라고 불렀다. 언니가 부탁하는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진실하게 들렸고 여운이 깊은 말은 나를 잠기게 했다.


누구 부탁이면 나는 이의를 달지 않는가?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한 번이라도 생각한 적 있는가? 회한의 순간들이 빗방울처럼 떨어져 내렸다. 가슴이 아려올 때 그녀가 말했다. “그리고 조건이 되니까요. 혼자 살아요.”


왜 혼자 사는지 물으려다가 묻지 않았다. 괜한 질문으로 곤혹스럽게 만들까봐. 이를테면 아버지는 뭐 하셔? 같은 질문을 받으면 소심한 나는 더 작아지곤 했으니까. 중학생 때 아빠 없는 아이를 바라보는 시선에 충격을 받아 성인이 되어서도 아빠의 부재를 오래도록 숨기고 싶었다. 그 마음을 기억하기 때문에 질문하지 않기를 택할 때가 있다.


그녀에게 질문하는 대신 나는 갑자기 바꿔버린 내일의 행로를 신이 나서 말했다. 봉황의 날개 위에 오를 것이라고. 그러자 그녀는 비봉산만 가지 말고 청풍호에 가서 유람선을 꼭 타보라고 권했다. 유람선을 타고 옥순봉과 구담봉을 관람하라고. 설명을 잘해주는 선장님을 만나면 금상첨화고. 옥순봉, 구담봉이 귀에 설지 않았다. 풍류를 아는 조선 문인들이 배를 타고 옥순봉, 구담봉 등을 유람한 소회를 시문으로 남기지 않았던가.


차도 다니지 않는 거리에서 우리는 이야기에 실려 가고 있었다. 어느새 집 가까이 왔는지 그녀가 별안간 집이 별로 안 좋다고 말했다. 베풀면서도 내가 불편할까봐 걱정하는 듯, 더 좋은 집으로 데려가지 못해 미안해하는 듯 했다. 그래서 그녀에게 말했다. 제 집도 별로 안 좋아요. 앞을 보고 걸어가던 그녀가 나를 보고 웃었다. 그러고는 언덕 위에 있는 아파트를 가리켰다. 저기예요.


골목으로 들어서니 마트가 있었다. 화장지 좀 사서 갈까요? 그녀에게 감사한 마음을 무엇으로라도 표현하고 싶어 마트 입구에 멈춰서 물었다. 화장지는 필수품이면서 잘 풀리라는 축복 의미까지 있으니 그녀도 부담 없지 않을까 생각한 것이다. 그녀는 괜찮다고, 다 있다고 만류하면서 내 팔을 잡아 당겼다.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자 마음을 받아주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는지 그러면 음료수를 사서 갈까요? 하고 그녀가 물었다.


음료수를 사는 데도 그녀는 따뜻한 게 좋은지, 찬 게 좋은지 내 의사를 계속 확인했다. 한여름 밤 온장고에서 두유를 두 개 꺼내 들고 그녀는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했다. 따뜻한 두유를 손에 쥐고 큰 도로에서 휘어지는 골목길을 한참 걸어 올랐다.


높은 언덕에 있는 아파트는 초록색 계단이었다. 자정이 가까운 밤, 복도에 정적이 흘렀다. 3층 복도를 지날 때 불이 환하게 켜진 창이 있었고, 창 너머로 조곤조곤 말소리가 새어나왔다. 그날따라 사람의 말소리가 정겹게 들렸다.


그녀가 현관문 비밀번호를 누르는 잠시 아파트 복도 밖을 내다보았다. 멀지 않은 곳에 낮은 산이 보이고 풀벌레 소리가 들렸다. 긴장되면서도 설레었다. 곧 한 사람 안으로 들어갈 것이므로. 집이라는 내밀한 마음 안으로.  


그래서일 것이다. 그녀가 현관문을 열었을 때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준다고 느낀 까닭은. 내가 집으로 들어가도록 그녀가 몸을 비켰다. 내가 먼저 집안에 발을 들여놓았다. 아기자기한 문양의 방석이 깔린 이인용 소파와 씽크대와 냉장고가 전부인 간결하고 정결한 거실로 올라서면서 양말이 비에 젖지 않아 정말 다행이라 생각했다. 거실을 지나 들어간 방 한쪽에는 책상이, 한쪽에는 침대가 있었다. 벽면에는 나무로 된 십자가가 걸려 있었고. 그뿐이었다. 수행자의 거처 같았다.


혼자 여행을 많이 다니세요? 어색하게 서 있는 내게 그녀가 물었다. 여행은 내게 바람이었지. 나는 언제나 자신에게 지키지도 않을 약속을 남발한 사람이었으니. 그래서 기다릴수록 지치고 상처만 남았으니까. 한 날은 일어나고 싶지도 않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자기 사랑에 목마른 나는 나에게 저항하고 있었다.


“이제라도 저한테 잘해주고 싶어서요.”

“그럼요. 자신이 제일 소중해요.”


마스크를 벗은 그녀의 표정이 해맑았다. 먼저 씻는 게 편하시죠? 의문문으로 끝나는 그녀의 말끝에서 존중받는다고 느꼈다. 편의점에서 칫솔을 사려고 했더니 그녀가 집에 새 칫솔이 있다고 사지 못하게 했는데, 목욕탕 벽장을 여니 새 칫솔이 있었다. 칫솔을 꺼내 양치질을 하는 동안 그녀에게 들은 말이 맴돌았다. 문득 그녀가 노크했다. 문을 살짝 열고 내민 손에는 새 속옷이 들려 있었다.


내가 목욕탕에서 나오니 그녀는 하얀 망사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편한 잠옷이 아니라 근사한 옷을. 너무 예뻐요. 외출해야 할 것 같아요. 내가 말하자, 그녀는 뚱뚱해서 입고 나가지 못해 집에서 입는다고 했다. 혼자 있을 때 자신에게 예쁜 옷을 입혀주는 그녀가 장롱에서 새 이불을 꺼내 침대에 깔았다.


침대에서 주무세요. 내게 말했다. 내가 바닥에 자겠다고 하자 여름에는 침대에 잘 자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고는 바닥에다 요를 다 펼치지 않고 반을 접은 채로 깔았다. 침대 위에 오르자 깔아준 이불의 촉감이 시원하고 좋았다. 반듯하게 누웠으나 몸은 나도 모르게 그녀를 향했다. 그녀도 몸을 돌려서 얼굴이 나를 향하게 했다. 떨어져서 서로를 바라보는 간격에서 편안함을 느꼈다.


그녀는 나에게 무슨 띠인지, 무슨 일을 하는지, 고향은 어디인지 물었다. 어둠 속에서 눈을 뜨고 혹은 눈을 감고 대답하면서 공연히 곧이곧대로 말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나이, 직업, 고향 다음에는 종교겠지 생각했다. 역시나.


“혹시 종교 있으세요?”


절도 교회도 성당도 가보았지만 나는 어디에도 가지 않으므로 무교라고 했다. 그런데도 불교는 아닌지 다시 물었다. 엄마가 불교 신자라고 하자 그녀도 시어머니를 따라 절에 다녔다고 하더니 어느 순간 나를 더 깊은 곳으로 끌어당겼다.


“신이 있다고 생각하세요?”

“밖에 있지 않고 안에 있다고 생각해요.”

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자기 안에?”

“네.”

“맞아요!”

환호하듯이 말했다. 그녀가. 그쵸? 가 아니라 맞아요! 하고.


‘제가 어떻게 여기에 있겠어요. 저는 지금 이 순간 당신과 함께 있는 게 기적 같아요. 저는 잘 곳을 찾지 못하고 어디로 가야할지 알지 못했죠. 그런데 이렇게 안전하고 안락한 곳에 있잖아요.


편의점에서 여사님이 지인 집에 묵을 수 있을 것 같은데, 한번 물어볼까요? 라고 말할 때 그분을 만난 지 몇 분도 되지 않은 때였어요. 난생 처음 만났는데 말예요. 낯선 제게 그런 제안을 했어요. 전염병 때문에 누구도 반기지 않는 이때. 그분의 부탁에 당신은 망설이지도 않고 승낙하셨죠. 저를 데리러 오셨잖아요. 어떻게 그럴 수 있나요? 보이지 않는 손길을 느껴요. 보호받고 있어요. 제게 나타난 당신 누구신가요?’


혼자 속으로 길게 말하다 그녀의 말을 듣지 못하고 잠들었는지 모른다.      



잠이 깨었으나 눈을 감은 채 누워 있으니 그녀가 일어나 밖으로 나가는 기척이 났다. 불을 끄고 누워 이야기할 때 새벽 한 시가 넘어가는 것을 보았는데, 잠든 사이 여섯 시가 되어 있었다. 샤워하는 소리가 들렸다.


방문을 열고 나가자 젖은 머리에 루프를 말고 그녀가 가스레인지 앞에서 요리를 하고 있었다. 프라이팬에 감자를 볶으면서 무쇠 냄비의 계란찜에 넣을 파를 송송 썰고 있었다. 나를 돌아보고는 잘 잤느냐고 물으면서 환하게 웃었다. 오십 대 여인의 얼굴이 천진하게 보였다.


“아침에 늘 이렇게 요리하세요?”

내가 물었다.

“아침에는 주로 떡을 먹어요.”


평소와 달리 그날 아침 그녀는 나를 위해 요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감사하고 미안해 뭘 도울지 묻는 내게 신앙인 같다고 했다. 절대적으로 신앙해야 할 존재를 잊고도 잊은 줄 모르고 산 나에게. 신앙이란 무엇인가? 조셉 머피 목사에 따르면 합리적이고 분석적인 의식하는 마음을 몰아내고 완전히 잠재의식의 내적인 힘에 의지하는 태도를 말한다. 곧 믿는 대로 이루어지리라는 확신이다. 내게 결여되어 있던 것.


나는 내적인 힘에 의지하는 마음자세로 잠재의식을 활용해야겠다고 다시금 다짐했다. 내 안의 큰 힘을 방치하고 있는지도 모를 만큼 나는 나에 대해 무지했기에. 내가 가진 내적인 힘을 믿지 못하고 활용하지 못해서 삶이 힘들었기에.


삶의 길에서 기이하게 만나 함께 밥상을 차리는 아침. 냉장고 옆에 세워둔 상이 보였다. 펼치고 보니 무척 큰 상이었다. 여섯 명 정도는 앉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상에 올릴 반찬을 담을 그릇을 꺼내려고 그녀가 씽크대 문을 열었다. 진열되어 있는 그릇들을 본 순간 놀랐다고 해야 할까. 감동받았다. 보이는 것은 가지런한 그릇 뿐이었으나 그것이 빚어내는 분위기가 한밤중 현관문을 열고 집안을 보았을 때 정결한 인상과 다르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곳이 보이는 곳과 같았다.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보이는 것 같았다.


반찬통에 담긴 마늘쫑이며 뽕잎 장아찌며 파김치를 그릇에 조금씩 덜어 담았다. 그녀가 아침에 요리한 감자볶음과 달걀찜과 된장찌개까지 상에 올리니 상이 크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는 여행할 때 속이 든든해야 된다고 내게 많이 먹으라고 했다. 다정한 그녀를 어떻게 불러주면 좋을까? 호칭을 내내 생략하다가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그러자 그녀가 언니라고 부르라는 게 아닌가.


언니? 언니가 없는 나는 어린 시절 언니 있는 친구가 제일 부러웠다. 언니는 내게 너무나 다정한 호칭이기 때문에 선생님 같은 분에게 언니라고 부르려니 입이 안 떨어졌다. 그녀도 쉽지 않으리라는 걸 알았는지 그렇게 못 부르면 모르지만이라고 하면서 양보했다.


내게 마음을 활짝 열고 다가와 큰 언니처럼 대해주는 그녀에게 호칭으로 거리감을 두는 것 같아 미안해졌다. 용기를 내 언니라고 한번 불러보았다. 그러자 그녀는 어젯밤에 이어서 자신의 신앙생활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어릴 때 교회에 다녔지만 성경을 믿을 수 없었고, 결혼하고 시어머니를 따라 절에 다녔는데 거기서도 자신이 가진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고. 그런데 제천으로 이사 와 교회에 다니면서 다 해결되었다고. 모든 게 성경 말씀 그대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확신에 차서 말하는 그녀는 행복해 보였다.


궁극적인 행복을 얻기 위해서는 삶의 방향을 제시해줄 수 있고 실제로 경험할 수 있는 원리를 찾아야 한다고 말한 네빌 고다드가 떠올랐다. 그 원리를 성경에서 발견했다는 그의 책『부활』을 책장에서 발견하고는 다시 반복해서 읽고 있었다. 그는 자기 책이 인간의 마음을 고대의 스승들이 하느님으로 찬양했던 만물의 근원이자 유일한 실체로 다시 돌리기를 희망하면서 하느님에 대해 쓰인 모든 이야기들은 사실 인간의 의식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나는 절로 수긍하는 마음이 우러나 밑줄 위에 또 밑줄을 긋고는 했다.


그녀는 밥그릇을 비우고 밥솥에서 밥을 한 주걱 더 떴다. 내게도 더 먹으라고 권하면서 웃었다. 밥을 권하듯 말을 들려주며 하느님을 알아볼 수 있는 자리로 가도록 손을 내미는 것 같았다. 행복해지는 길을 알려주고 싶어 하는 마음을 모르지 않았다. 남모르는 종교 체험을 한 사람은 그렇지 않은 이를 볼 때 안타까운 마음이 일어날 테니까.


그녀처럼 밥을 한 주걱을 더 떠서 밥그릇에 담았다. 신이 자기 안에 있다는 걸 내가 아는 게 놀랍다고 그녀는 말했다. 성경에 대한 그녀의 말을 계속 들으면서 신이 자기 안에 있는데 왜 굳이 성전을 찾아 가야 하는지 의문이 솟았다. “신은, 신으로서 그지없는, 입을 다문 침묵이다.”(에드몽 자베스,『예상 밖의 전복의 서』, <일지>)


그러니 “제 안으로의 입장, 그것이 곧 전복의 발견이다.” 에드몽 자베스의 시를 빌려 표현하면 제 안으로의 입장, 그것이 곧 신의 발견이다. 제 안으로 입장하는 데 중개자를 거쳐야할까?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제 안으로 입장할 수 있다면 어디에 가지 않아도 신을 발견하는 게 가능하지 않겠느냐고 물어볼까 말까 망설였다. 질문을 하면 말이 끝날 것 같지 않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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