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롭 Mar 12. 2023

밤이 물처럼 나를 가두어

한 방울 물방울 같은 기도 1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었다. 비옷을 입고 있어 옷은 젖지 않았지만 마음은 축축하고 무거웠다.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영화가 끝났을 때야 집으로 갈 일이 구체적인 현실로 다가왔다. 청각 장애를 딛고 피아니스트의 꿈을 이룬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소나타>를 보려고 의림지에 도착할 때만 해도 몰랐다. 그날 집으로 돌아가지 못할 줄.


저녁 6시에 시작된 제천국제음악영화제 개막식이 예상 밖으로 두 시간도 넘게 진행되면서 길어지자 초조했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갈 방도는 개막식 후 상영되는 영화가 끝난 뒤에 찾기로 했던 것이다. 오직 <소나타>를 보기 위해 그곳에 갔으니 차 시간에 맞춰 집으로 돌아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영화가 끝났을 때는 제천역에서 밤 10시 19분에 출발하는 청량리행 마지막 기차가 떠난 시간.


관람객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일제히 한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들을 뒤따라 주차장에 도착하니 관람객을 시내로 데려다 줄 전세 버스 한 대가 대기하고 있었다. 비옷을 입은 채로 사람들이 버스에 올랐다. 기차가 이미 끊겼으니 나는 버스터미널로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영화제 스텝이 승차 문 앞에서 안내하고 있었다. “이 차 터미널로 가나요?”


그는 내게 어디로 가는지 물었다. 서울요. 서울 가는 버스는 끊겼어요. 끊겼다고요?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가 잘못 알고 있을 수도 있으니까. 심야버스가 있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버스에 오르자 몇몇 사람들이 자리에 드문드문 앉아 있었다. 얼마 후 버스는 차내 불을 끄고 출발했다.


제천에서 서울로 가는 버스 시간표를 검색하니 버스에 오르기 전 그에게 들은 대로였다. 집으로 가는 길이 정말 다 끊긴 것이다. 기가 막혀 눈을 감자 비 내리는 저녁에 본 의림지 속 순주섬이 떠올랐다. 밤이 물처럼 나를 가두어 섬이 되어버린 기분이라니.


대책 없이 깊은 한숨을 내쉬는 사이 버스 목적지인 메가박스 앞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마지막으로 내가 내렸을 때 주위에 아무도 없었다. 함께 버스를 타고 온 이들이 모두 금방 사라져 어디로 가버렸는지 알 수 없었다. 맞은편에 중앙시장이라고 써진 큰 글자가 보였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하지? 차도 없고 사람도 없는 시내 한복판에 우두커니 서서 사방을 둘러보니 무서웠다. 열한 시가 가까운 밤, 제천 시내는 너무 깜깜했다. 빨간 오뎅을 파는 분식집 한 곳만 불을 밝히고 있었다.


손님 없는 텅 빈 분식집을 지나면서 일단 지도 앱을 열고 제천역을 도착지로 설정했다. 시내에서 내가 아는 유일한 곳이었으므로. 길을 걷다가 문득 찜질방에서 밤을 보내면 되겠다 싶었다. 막연하지만 역 근처에 찜질방이 있을 것 같았다. 마침 횡단보도 앞에 다다랐을 때 앞길의 무슨 청신호처럼 신호등이 초록불로 바뀌었다. 한산한 횡단보도를 혼자 건너면서 역 방향이 맞는지 확인하려고 두리번거리는데 눈앞에 편의점이 번쩍 나타났다.


불 켜진 편의점 간판을 보자 분식집 불빛을 보았을 때와는 달리 반가움이 밀려왔다. 연상되는 어떤  좋은 기억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리던 사람을 거리에서 우연히 발견이라도 한 양 몸이 절로 그쪽으로 이끌렸다.


편의점 문을 열고 들어서자 오십 대로 보이는 여사님이 카운터에 있었다. 나는 카운터로 직진했다. 길을 물으려고 하더라도 보통 물건을 하나 고른 뒤에 물을 텐데 내게는 그럴 정신이 없었다. 불쑥 들어가서 여사님과 눈이 마주쳤을 때 나를 보고 웃는 눈을 보았다. 그냥 내 존재 자체로 환영받는 기분이었다고 할까.


그녀의 맞은편에 서자 있는 그대로 말이 술술 나왔다. 빠른 말로 제천역으로 가는 길을 물었다. 혹시 역 근처에 찜질방이 있는지도. 영화제에 왔다가 마지막 기차를 놓쳤다고. 새벽 첫 기차를 타고 돌아갈 것이라고.


여사님은 찜질방이 거기 있는지 모르겠다고 하면서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끊고 찜질방 이름과 위치를 알려주었다. 마음먹은 대로 되어가고 있는 데도 기쁘지 않았다. 마음이 변덕을 부려 기쁘기는커녕 주저되었다. 찜질방이야말로 코로나에 걸릴 위험이 높은 곳이라는 게 뒤늦게 생각난 것이다. 내가 걱정스러워하자 여사님이 문득 제안했다.


“지인 집에 묵을 수 있을 것 같은데, 한번 물어볼까요?”

“네?”


나는 눈만 끔뻑거렸다. 놀라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우리 방금 만났는데요? 지인 집에요? 저를 믿으세요? 속으로 말이 빠르게 흘러갔다. 온통 의문으로 가득한 말을 혼자 들으며 그녀의 눈을 보았다.


“베푸는 자의 눈길은 금빛으로 반짝인다. 금의 광채가 달과 해 사이에 평화를 가져다준다.” 차라투스트라가 말했지. 여사님을 보자마자 그래서 내가 안도했던가. 그녀가 거기 기다리고 있어 편의점을 발견한 순간 가슴이 요동쳤던가. 마스크 위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나를 그녀가 지그시 바라보더니, 대답을 들었다는 듯이 전화기를 들었다. 벽시계는 열한 시를 막 넘어가고 있었다.


“아직 안 잤어? 저기, 영화제 왔다가 기차를 놓치고 잘 데가 마땅찮은 분이 있는데, 하룻밤 묵을 수 있을까?”

아는 이라도 집에 오는 걸 꺼리는 때 더구나 낯선 사람을. 잠시 방문하는 것도 아니고 잠을 재우도록 부탁한 것이다. 그런 부탁을 받으면 황당할까, 당황할까? 상대방의 반응을 기다리는 잠시 긴장하며 숨을 죽였다. 그이의 표정을 볼 수 없으므로 전화기를 들고 있는 여사님을 기대에 찬 눈으로 바라보았다.


전화기 너머의 말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카운터 앞에서 여사님이 하는 말을 가만히 들으며 짐작할 수밖에 없었다. “제천이 처음이라 길을 모르셔.” “열두 시에 일이 끝나. 그때 같이 갈까?” 말을 듣고 보니 지인은 반문조차 하지 않고 부탁을 들어주는 듯했다. 전화를 끊고서 여사님이 온화한 표정으로 말하는 게 아닌가. “데리러 온대요.”


정말요? 기대했으면서도 진정이 되지 않았다. 기적이야, 기적이 일어났어! 내 안에서는 환성이 터지고, 극적으로 바뀐 상황에 어쩔 줄 모르다가 여사님에게 어떻게 낯선 이를 위해 어려운 부탁을 할 수 있는지 물었다. “한 남자 손님이 와서 영화제 때문에 모텔까지 다 차버렸다고 하더라구요.” 그 말을 듣고 저를 구제할 마음을 내셨다고요? 하는 말이 입안에 있었다. 이토록 놀라운 여름밤이라니!


얼떨떨한 정신이 조금 진정되었을 때 두 사람은 어떤 사이인지 궁금했다. 난처한 부탁을 스스럼없이 하고 또 들어줄 수 있는 관계가. “교회에 같이 다녀요.” 교회라는 말에 고등학교 친구가 생각났다. 무심한 내게도 친구라는 다정한 사람이 있는 것은 순전히 친구의 관심 덕분이니까. 친구는 교회에 다녔다. 내가 친구를 생각하는 사이 여사님이 덧붙였다. “그리고 혼자 살아요. 혼자니까 부탁할 수 있지요.”


비는 내리고 밤은 점점 깊어가고. 손님 없는 환한 편의점. 누가 밖에서 유리문 안의 우리를 보았다면 오래 아는 사이라고 여겼을지 모른다. 그녀는 내게 저녁은 먹었는지, 커피는 마시는지 물었다. 몸과 마음의 허기를 달래주고 싶어 하는 마음을 느꼈다. 그녀의 눈길에서. 정말 거대한 품속에 들어왔구나 생각했다.


소문으로 들은 도토리묵정식을 먹고 싶어 식당을 찾다가 의림지 주차장 근처에서 막국수 먹은 이야기를 하던 끝이었을까. 여사님이 왜 제천 여행을 하지 않고 돌아가려 하느냐고 했다. 그러고 보니 새벽에 첫 차를 타고 돌아가야 할 이유가 다행히 없었다. 차를 놓쳤다는 낭패감에 사로잡혀 어서 돌아갈 생각만 한 걸 깨달았다.


그제야 마음의 여유를 되찾고 제천에서 가장 추천하고 싶은 곳이 어디인지 물었다. 여사님은 감탄어린 표정으로 단번에 청풍이라고 말했다. “케이블카를 타고 비봉산에 올라 내려다보면 너무 예뻐요.” 청풍, 비봉이라는 지명을 음미하니 예뻐요 한마디에 담긴 마음을 알 것도 같았다. 지명은 누가 짓는 것일까? 맑은 바람이 불고 봉황이 날아오르는 산이라니. 날이 밝으면 내가 오를 곳은 기차가 아니라 비봉이다!


그때 편의점 출입문을 밀고 한 사람이 들어왔다. 단발머리에 눈이 큰 여인이었다. 그녀의 등장에 여사님이 반색을 했다. 그 순간 나를 데리러 온 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혼자라고 해서 내 또래거나 더 젊은이인 줄 알았는데 여사님과 같은 연배로 보였다. 마스크 위로 드러난 인상만으로도 품어주는 둥그런 마음이 보이는 듯했다.  


여사님이 소개하기 전에 우리는 서로 알아보고 멋쩍게 웃었다. 여사님은 도시락이며 샌드위치 등을 주섬주섬 검은 봉지에 담아 지인의 손에 들려주었다. 봉지를 받아들고 지인이 감사하자, 여사님은 자신이 더 감사하다고 했다. 나를 지인에게 인도하는 게 사명이라도 되는 듯이.      



계속―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