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민스방 Aug 26. 2023

오뎅 국물과 바꾼 당당함

주어진 것에서 느끼는 것이 진정한 행복이다.

“불편하면 참지 말고 말씀하세요” 

어깨가 아파서 병원에서 물리치료를 받던 중 물리치료사가 말을 건넸다. 

어느 정도의 통증이 참지 못할 만한 불편인지 불편하면 뭐라고 말해야 할지 입을 떼지 못했다. 

몇 달 전부터 팔을 높이 들어 올리거나 손을 등 뒤로 돌렸을 때 통증이 심해지고 팔을 움직일 때 뚝뚝하는 소리가 들려서 병원을 찾았다.

 “아”  나의 왜 마디 비명소리를 들고 치료사는 잠시 치료를 멈추면서... 

“네 그렇게라도 표현해 주셔야 치료 강도를 조절할 수 있어요”라며 느슨한 강도로 물리치료를 이어간다. 


몸이 아파서 병원을 찾아오는 어르신들은 웬만한 고통은 참고 살아오셔서 물리치료를 받으면서도 통증을 애써 참으려고 한단다. 나 또한 불편한 상황을 감내하며 받아들이는 습관을 지니고 살아오면서 어지간하면 병원에 가지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웬만한 불편은 참고 살았던 습관이 병을 키워가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나이 듦에 따른 노화의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것 같아 공허한 마음이 들었다. 이제 아프면 아프다고 말을 해야겠다.   

가난한 삶은 불편함을 주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인내심도 길러주었다. 또한 궁핍한 생활로 불편을 감수하며 보다 나은 내일을 위해 나 자신을 담금질하기도 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머니와 살아가면서 고등학생의 신분으로 할 수 있는 것은 공부를 열심히 해서 지금의 가난한 환경을 벗어나 어머니를 잘 모시는 길밖에는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상황에서 공부만 할 것이 아니라 돈벌이를 위해 공장이라도 가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런저런 생각 끝에 다시는 오지 않을 지금의 순간을 후회하지 않으려면 가난을 견뎌내고 공부해야 한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가난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고 다만 불편할 뿐이다.”

이 말이 그 시절에는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다.    

  

변변한 공부방이 없어서 공부에 집중하려고 독서실을 찾았었다. 형편상 유료 독서실 이용료를 낼 수 없어서 고민하던 중에 내 처지를 잘 아는 친구가 자기가 다니는 독서실에 총무를 구한다며 나를 그곳에 소개해 주었다. 나는 얼씨구나 하면서 독서실의 허드렛일을 하면서 책상 한 칸을 무료로 얻어 나만의 공간을 마련했다. 


공짜로 책상 한 칸을 얻은 대가로 독서실 계단을 청소하고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방해가 안 되게 발뒤꿈치를 들고 다니며 시간에 맞추어 공부방마다 연탄불을 갈아 주는 일이었다. 허드렛일을 마치고 책상에 앉으면 피곤함에 꾸벅꾸벅 졸기 일쑤고 공부에 집중하지 못하고 하루를 허망하게 보내는 날도 많았다. 

공부하려고 독서실에 간 것인데 청소와 연탄불 가는 일에 헤어나지 못하고 결국 석 달간의 독서실 생활을 정리했다.   

   

그 이후로 집에서 버스로 한 시간 거리에 있지만 무료로 운영하는 시립도서관으로 새 희망의 둥지를 틀게 되었다. 시립도서관은 선착순으로 좌석을 마감하기 때문에 좌석을 잡기 위해 휴일이면 새벽같이 도시락을 싸서 버스를 타고 도서관에 자리를 잡았다. 새벽에 일어나야 하는 부담은 있었으나 그전처럼 계단 청소를 하거나 연탄불을 신경 쓰지 않으니 공부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도시락 하나로 도서관이 끝나는 늦은 저녁 시간까지 버터야 해서 오후 두 세시가 되어야 도서관 구내식당에 가서 도시락을 먹었다. 

유난히 쌀쌀했던 그날도 여느 때처럼 도서관 구내식당에서 따뜻한 오뎅 국물을 사서 밥을 말아먹으려고 주머니 속에 동전을 꺼내 보니 70원이 전부였다. 

순간 잠시 망설여졌다. 동전을 만지작거리면서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 시절 시내버스 학생 요금은 60원이었다. 도서실 구내식당에서 한 그릇의 국물 값이 30원이었으니 오뎅 국물을 사서 먹으면 집에 갈 때 타고 갈 시내 버스비가 20원이 부족했었다. 추워진 날씨에 따뜻한 국물을 사서 차가운 밥에 뜨거운 오뎅 국물에 말아먹어야겠다는 생각이 앞섰다. 집에 돌아갈 때 부족한 버스 요금은 안내양 누나에게 사정해서 해결해 보겠다는 생각으로 구내식당 문을 들어섰다.   

   

그 당시 버스 안내양을 차장이라고도 불렀는데 푸른색 계통의 유니폼을 입고 허리에 전대 같은 가방을 차고 승객들에게 버스표를 직접 끊어 주었다. 학생들의 통학과 직장인들의 출퇴근 시간에 버스는 발 디딜 틈이 없이 사람들로 꽉 들어찼다. 버스 안내양들은 작은 체구에 어디서 그렇게 힘이 나던지 손님들을 버스 안으로 야무지게 밀어 넣고는 버스 출입구 손잡이에 의지해 아슬아슬하게 매달려가기도 했다. 내 누이 정도 되었던 버스 안내양들은 대부분 시골에서 도시로 돈을 벌기 위해 올라와서 어려운 환경을 벗어나려고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가고 있었다.   

   

나는 안내양 누나에게 말만 잘하면 착한 안내양 누나는 내 사정을 잘 들어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다시 한번 곱씹어보았다. 도서관에서 공부를 마치고 뿌듯한 마음을 품고 집에 가는 길에 부족한 버스비를 구걸하듯이 안내양 누나에게 부탁하는 내 모습을 상상하니 너무 초라해 보였다. 

무엇보다도 하루를 열심히 공부하고 그까짓 동전 몇 개 때문에 마음을 상하는 것이 싫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꾸어줄지언정 꾸임 받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 당시 내가 다니던 교회에 목사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동전을 주머니에 다시 넣고 구내식당 한쪽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도시락 뚜껑을 열어보니 새벽에 급하게 도시락에 담은 뜨거운 밥이 차가워져 있었다. 차갑게 엉겨진 밥 한 숟가락 입에 떠 넣는 순간 눈물이 주르륵 도시락에 떨어졌다. 그 순간 어린 마음에 슬픈 감정이 북받치면서 마음속으로 굳게 다짐했다.   

   

 “어른이 되면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남에게 꾸어줄지언정 꾸임 받지 않는 생활을 할 것이다.”     

 

이렇게 마음의 외침으로 생각을 돋우고 나니 이내 차갑던 밥이 배고픔을 더해 술술 잘 넘어갔다. 마지막 밥 한 숟가락을 입에 넣으면서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보지 않은 사람은 인생의 진정한 맛을 알지 못한다.”라는 문학가 괴테의 말을 곱씹으며 내일의 희망을 다짐했다.    

  

그날 밤 공부를 마치고 밤하늘에 빼곡한 별들을 보며 마음 가득 뿌듯함을 안고 버스정류장으로 힘찬 발걸음을 옮겼다. 버스에 올라 안내양 누나에게 궁색한 변명으로 선처를 구하는 내가 아니고 버스 요금을 당당하게 내는 나에게 소리 없는 박수갈채를 보냈다. 매번 늦은 시간에 버스를 타면 꾸벅이며 졸며 가던 것과는 다르게 또렷한 정신으로 버스 차창에 비친 내 모습을 보았다. 차가운 도시락을 먹으며 눈물 흘렸던 기억이 새로워졌다. 앞으로의 나의 삶의 방향타가 될 것이라 다짐하며 무엇인가 모를 자신감이 솟아났다.  

   

삶을 살아가다 보면 잠재의식 속에 부정적이거나 긍정적인 생각을 하게 된다. 때로는 부정적인 생각이 긍정적인 생각보다 더 현실에 가깝게 느껴지기도 한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커지는 이유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막연한 불안감은 긍정적인 자기 암시를 통해 자신감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  

    

그날 시립도서관 식당에서 선택의 갈등 속에 나만의 답을 찾았던 것은 지금의 불편함을 참아내면 내일의 희망을 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잠재되어 있었던 것 같다. 

그 당시 버스 안내양 누나에게 부족한 버스 요금으로 궁색한 이야기를 하지 않으려 한 것은 내 자존감만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어쩌면 당혹스러워하는 안내양 누나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 했던 마음도 있었다. 


내가 그동안 살아오면서 부딪쳤던 수많은 불편을 참으며 감수할 수 있었던 것은 작으나마 타인에 대한 배려의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불편함을 참을 수 있는 것은 날마다 마음속에 희망을 상상하며 긍정적인 자기 암시를 통해 목표를 이루어 나가는 굳은 신념이 있기 때문이다.     

 

“어깨 물리치료 다 했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라며 밝게 웃어 주는 물리치료사도 내가 물리치료를 받으며 통증을 애써 참고 있었던 것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병이 나면 참지 말고 병원을 찾아야 하고 아프면 아픈 것을 참으려 하지 말고 말을 해야 제대로 치료를 받을 수 있다는 물리치료사의 말이 새삼 정답게 느껴졌다. 



매거진의 이전글 처음이자 마지막 "어부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