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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스방 Aug 19. 2023

신문 배달과 스케이트

주어진 것에서 느끼는 것이 진정한 행복이다.

뿅! 

경쾌한 소리와 함께 오랜 시간 와인을 가두고 있었던 코르크 마개를 땄다. 

그리고 마치 오래된 레스토랑의 소믈리에처럼 우아한 자세로 둥근 와인잔에 방금 딴 레드와인을 따랐다. 

붉은색으로 채워지는 와인잔 너머에 막내딸의 환한 미소가 보인다. 


어느 주말 저녁 막내딸과 식탁에서 와인잔을 마주치며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어느덧 아빠와 와인 한잔할 수 있는 나이로 훌쩍 큰 막내딸의 모습에 놀랍기도 했고 반갑고 아쉬운 마음도 들었다. 늘 마음속으로는 중학생 정도로 여기고 있었는데 어느새 어른이 되어있었다. 

어쩌면 막내딸을 늘 중학생의 모습으로 내 마음에 가두고 싶었는지는 모르겠다. 


막내딸의 중학교 시절 에피소드를 생각하면 항상 입가에 미소가 맴돈다. 

어느 날 아침에 담임선생님이 딸아이가 학교에 오지 않았다고 집으로 전화가 왔었다고 한다. 학교가 집에서 가까워서 천천히 걸어도 10분이면 충분히 갈 수 있었다. 딸아이가 학교에 오지 않았다는 전화에 아이 엄마는 놀라서 아이를 찾으러 집을 나서던 중에 이제 막 등교했다는 연락을 받고 안심했다고 한다. 

지각한 이유를 듣고 천진난만한 막내딸의 행동에 웃음이 났다. 


우리가 살던 아파트 뒤편에는 나지막한 야산을 둘러쌓은 공원이 있었다. 학교 가는 길은 공원 둘레길을 지난다. 평소에 나도 산책하며 자연의 상쾌함을 느낄 수 있었다. 막내딸은 등굣길에 공원 숲 속에서 뛰어노는 청설모를 보고 신기해서 잠시 멈추어서 본다는 게 시간이 꽤 많이 흘러갔다고 했다. 

지금 생각해도 막내딸의 순수하고 맑은 모습에 입꼬리가 올라간다.      

질풍노도와 같은 중학생 시절을 말썽 없이 잘 지내온 막내딸의 에피소드 속에 시대를 뛰어넘어 나의 중학생 시절이 떠올랐다. 


추운 겨울이 되면 동네 논이나 개울에 얼음이 얼었고 추운지도 모르고 친구들과 어울려 놀곤 했다. 

겨울방학이 되면 꽁꽁 얼어붙은 얼음판에 약속이나 한 듯이 동네 아이들이 모여들었다. 

나무판자나 사과 궤짝에 굵은 철사나 못쓰게 된 스케이트 날을 덧대 썰매를 만들어 타면서 한겨울 찬바람에 흐르는 콧물을 연신 손등으로 닦아내며 해가 지는 것을 아쉬워했었다.

물이 고여있던 논이나 개울가는 추위에 자연적으로 얼음이 얼어 동네 썰매장이 되었지만 어떤 논은 일부러 논에 물을 채워 얼음을 얼려서 스케이트장을 만들어 입장료를 받고 운영하기도 했다. 


스케이트장은 날카로운 지팡이 질에 얼음이 파이는 썰매는 입장 금지였다. 나는 개울가에서 썰매를 타면서 스케이트를 재밌게 타는 아이들이 부러워서 다음 겨울에는 꼭 스케이트를 사서 멋지게 타겠다고 결심했다. 

개울가에 얼었던 얼음이 녹고 봄 학기를 시작할 무렵에 내년에 신나게 탈 스케이트를 상상하면서 스케이트를 살 수 있는 돈을 모을 궁리를 했다. 넉넉하지 못한 가정 형편에 용돈이라야 통학을 위한 버스 교통비와 약간의 주전부리 돈이 전부였다. 


우연히 어느 날 전봇대에 붙어 있는 신문배달원 모집 광고를 보고 무작정 신문보급소를 찾아가 신문 배달을 시작했다. 처음 해보는 신문 배달이 공교롭게도 거리도 멀어서 아버지의 자전거를 타고 신문 배달을 해야 했다. 신문 배달 지역이 멀기도 했지만 한센병 환자들이 양계장을 운영하며 생활하는 나환자촌도 끼어있었다. 평소에는 갈 일이 없는 동네인데 매일 새벽에 신문 배달을 하게 되었다. 


신문보급소 소장님은 그 지역에 신문배달원을 구하지 못하다가 덜컹 제 발로 신문 배달을 하겠다고 찾아가니 그날로 바로 인수인계를 해주셨다. 

그러나 스케이트를 사겠다는 집념이 있어도 매일 새벽에 일어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매일 새벽 매캐한 닭똥 냄새를 맡으며 신문 배달을 마치고 이제 막 일어나 등굣길에 오르는 친구들과 마주칠 때면 내가 마치 다른 세상을 살아가는 느낌이 들곤 했다. 


때로는 땀에 젖은 속옷을 그대로 입고 학교에 가서 옷에 밴 닭똥 냄새 때문에 친구들의 놀림도 당했지만 스케이트를 사려는 강렬한 욕망으로 참아낼 수 있었다. 여섯 달 정도 지나면서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서 두 시간 이상 신문 배달을 하고 학교생활을 하기에는 체력의 한계를 느끼기 시작했다. 


어느 날은 너무 힘들어서 스케이트를 마련한다는 목표가 싫어지기까지 했다. 죽을 각오를 하고 이를 악물고 해야 할 목표도 아닌데 이렇게 어렵고 힘든 일을 왜 해야 하나라는 회의적인 감정이 들기도 했었다. 

그럴 때마다 그해 겨울 스케이트를 타는 나의 모습을 상상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렇게 열 달 남짓 동안 목표를 향해 어렵고 힘든 상황을 꾹 참아가며 마침내 스케이트를 사는 목표를 이루고 성취감도 느끼게 되었다. 


신문 배달을 해서 마련한 스케이트는 그해 겨울 큰 기쁨으로 얼음판에서 나를 신나게 했다. 그 당시 우리 집은 스케이트를 사줄 형편이 안되어 경험한 일이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면 목표를 위해 실행했던 것들이 무모해 보이기도 기특해 보이기도 했다. 철없는 중학생 시절에 이루려는 목표를 세우고 새벽잠을 줄이며 신문배달에 대한 책임감에 어렵고 힘든 시기를 잘 넘겼던 경험은 훗날 내가 살아가면서 큰 도움이 되었다.    

  

등굣길에 청설모를 보고 시간을 멈춰버린 막내딸이 어느덧 대학을 졸업하고 취준생으로서 고민을 와인에 담은 대화는 새벽까지 이어졌다. 나의 대학 시절은 지금보다 환경은 열악했어도 국가의 경제 발전이 가속화되고 기업의 생산과 수출이 늘어나 웬만큼 노력하면 직장 취업은 걱정하지 않았었다. 

그렇지만 손바닥만 한 스마트폰 하나로 세계를 만날 수 있는 지금의 발전된 환경에서 취업이 바늘구멍 찾기보다 어려운 현실이다. 


막내딸과의 새벽까지 이어진 대화는 때로는 친구같이 서로 이해해 주려는 마음이 컸었던 것 같다. 

막내딸은 등굣길 에피소드처럼 천진난만한 걱정 없던 시절을 지나 이제 청년 취업난 속 현실의 삶을 헤쳐가야 할 고민 덩어리가 커졌다. 


우리가 삶을 살아가다 보면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 불안감과 두려움이 앞서기도 한다. 더욱이 요즈음 같은 경쟁 사회에서는 어려서부터 남들보다 뛰어나려고 애쓴다. 

어른이 되어 되돌아보면 이런 불안감은 우리가 지녀야 할 순수한 감정을 짓눌러 왔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중고교 시절 학업성적이 나쁘거나 그래서 좋은 대학에 들어가지 못하면 스스로가 경쟁에 뒤처진 인생으로 생각한다. 대학을 졸업하고 번듯한 직장에 취업하지 못하면 뭔가 모를 열등감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이렇듯 일류 대학을 졸업하고 대기업에 입사하여 높은 연봉을 받아 큰 평수 아파트에 사는 것이 인생의 성공적인 삶을 살아간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정작 삶을 살다 보면 일류 대학을 나온 사람이나 지방대학을 나온 사람들이나 삶의 모습과 형편이 큰 차이가 없는 경우를 종종 본다. 

우리가 행복한 삶을 만드는 데는 스스로 느끼는 일상의 만족감이 일 것이다. 


만족(滿足)은 한자로 보면 가득 찰 만(滿)과 발 족(足)으로 지나친 욕심이 아닌 우리의 발목까지 차오른 행복감이 아닐까 한다. 

아무리 돈이 많은 사람이라도 불안한 마음에 불면증에 시달리거나 넓고 큰 아파트에 살아도 우울증을 안고 산다면 그런 삶이 행복하다고는 하지 않을 것이다.  

그날밤 식탁 한쪽을 채워가는 와인병 개 수만큼 늘어지며 무르익은 막내딸과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는 밤이 새도록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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