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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김밥이 더 맛있다.

주어진 것에서 느끼는 것이 진정한 행복이다.

by 민스방

코로나가 점령한 세상, 두 번째 겨울을 맞닥뜨리며 지친 마음을 토요일의 쉼으로 보상받으려고 침대 깊숙이 따스함에 게으름을 피우다가 텔레비전을 켰다.

눈이 그치고 한낮 기온이 영상이라는 기상캐스터의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어진 뉴스에서 최근에 전례 없이 자주 찾아왔던 강추위가 지구온난화의 영향이라는 기상전문가들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막연한 걱정이 앞섰다.

기상전문가는 우리나라 상공에 있는 제트기류가 겨울철 북극에서 내려오는 찬 공기를 막고 있는데 지구온난화로 제트기류가 뚫려서 북극의 찬 공기가 고스란히 우리나라 쪽으로 밀려와 엄청난 한파가 찾아온 것이라고 했다.


그동안 지구온난화는 이산화탄소 같은 온실 기체가 공중으로 올라가 지구를 둘러쌓아서 대기의 열이 지구 밖으로 나가는 것을 막아 지구의 기온을 높여 지구가 점점 따뜻해지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매년 기록적인 강추위가 점점 확대되고 있는 것이 의문이었는데 기상전문가의 해설을 듣고 궁금증을 풀었다.


뉴스를 통해 궁금증도 풀렸고 추웠던 날씨도 풀렸는데 추위와 코로나로 갇혀 지내는 몸과 마음에 변화가 필요했다. 혹시나 해서 주말이면 관람 인원 제한으로 갈 수 없었던 국립수목원 홈페이지에 접속해 보았다.

변덕스러운 날씨에 당일 취소한 사람이 생겼는지 예약 가능 인원이 몇 명 남아 있었다.


얼씨구나 하고 곧바로 예약하고 겨울 숲의 신선한 공기를 맡으며 콧바람 쐬는 설렘에 아내와 서둘러서 출발 준비를 했다. 갑자기 가게 된 나들이이지만 오며 가며 차에서 먹을 간식을 준비하면서 마치 어린 시절 소풍 가는 날에 먹었던 김밥에 대한 추억이 새삼스럽게 떠올랐다.


초등학교 시절에 소풍 가는 날은 이상하게도 비가 오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소풍 가는 전날에는 소풍 가는 것에 대한 설렘과 날씨에 불안감을 안고 잠이 들곤 했었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며 비가 오지 않고 맑으면 불안감이 사라졌다.


부엌에서 들려오는 어머니의 도마질 소리와 밥 짓는 고소한 냄새가 코끝에 맴돌더니 뱃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점점 커져간다. 이제 막 지은 밥에 참기름과 깨소금을 넣어 김밥 재료를 만들면서 풍기는 고소한 냄새 때문이었다.


우리 어머니 김밥은 단순했다. 김밥 속엔 노란 단무지와 계란지단과 시금치뿐이다.


창밖을 보니 맑은 하늘이 설레는 마음을 재촉했다. 전날 사놓은 과자 몇 개와 사이다 음료수 그리고 이제 막 만든 김밥을 가방에 담아 둘러메고는 학교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학교 운동장에 들어섰더니 조용했던 교실과 달리 아이들이 서로 엉켜서 떠들고 장난치면서 모여있었다.

반별로 나누어 울긋불긋한 들꽃과 푸른 소나무 숲이 있는 인근 산으로 향했다.


매년 같은 장소로 소풍을 가지만 학교를 벗어나 친구들과 어울린다는 생각에 즐겁기만 했다.

걷기에는 조금은 먼 거리이지만 웃고 떠들며 걷다 보면 어느덧 나지막한 산언덕에 도착한다.

소풍 장소에 도착하면 반별로 장기 자랑도 하고 선생님들이 숨겨 놓은 보물찾기 게임을 한다.

그런데 다른 애들은 숨겨진 보물을 잘도 찾는데 나는 하나도 못 찾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도 뚜벅뚜벅 보물을 찾으러 돌아다니다가 소풍의 하이라이트인 점심시간을 맞는다.


둘레둘레 아이들이 모여 앉아서 소풍 가방을 열어 도시락을 펼치기 시작했다.

나는 같은 반 친구들이 펼쳐놓은 김밥 도시락을 본 순간 가방에서 도시락을 꺼내려고 넣었던 손을 움찔하고 멈추었다.

내가 싸간 김밥과 다르게 햄과 소시지를 넣어서 눈으로 보기에도 화려하게 보이는 친구들의 김밥을 보는 순간 내 김밥은 가난한 집 김밥으로 여겨져 김밥을 꺼내기가 망설여졌다.


가방을 열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나를 보고 친구들은 빨리 꺼내서 함께 먹자고 내 가방을 잡아끌었다.

단무지에 계란과 시금치뿐인 초라한 내 김밥을 마지못해 꺼내놓았다.

각자가 가져온 김밥 도시락을 앞에 내놓고 아이들은 젓가락으로 서로의 김밥을 먹으면서 김밥 속에 감춰진 마법의 맛에 빠져들었다.


신기하게도 내 김밥을 먹은 친구들이 “맛있다”라는 말을 연거푸 하면서 순식간에 내 김밥이 아이들의 입속으로 사라졌다.

햄이나 소시지는 비싸서 김밥 속에 넣지 못했던 내 김밥이 제일 인기가 있었다.

친구들의 싸 온 화려한 색깔의 김밥보다 고소한 참기름으로 적당하게 밑간이 된 밥에 어머니의 손맛이 배어있는 내 김밥이 친구들의 입맛에 맞았던 것 같다.


값비싼 재료가 아니어서 초라하게만 생각했던 내 김밥이었다.

하지만 어머니의 정성이 담긴 김밥을 맛본 아이들이 맛있다며 순식간에 먹어 치웠다.

어머니의 김밥은 햄과 소시지로 만든 화려함이 아니라 소박하지만 정성 어린 어머니의 손맛이 담겨 있었다.

아련하게 떠올랐던 어린 시절 소풍의 추억을 뒤로하고 아내와 나는 나들이 준비를 서둘렀다.

김밥을 만들기에는 시간이 충분하지 않아 냉장고를 뒤져서 과일과 음료수를 챙겨서 집을 나섰다.

일상의 답답함을 해소하기 위한 것도 있었지만 어머니의 마음과 같은 따뜻하고 순수한 자연의 느낌을 받고 싶은 욕구에 광릉 국립수목원으로 향했다.


아내도 수목원으로 가는 동안 내내 모처럼의 드라이브에 기분전환이 되는지 차창 밖에 경치를 보며 즐거워했다.

어느새 수목원 입구를 들어서면서 느껴졌던 신선한 공기는 오랫동안 일상에서 한 몸이 되어온 마스크를 벗으라고 유혹하기 시작했다.

아내와 나는 수목원 깊숙이 사람이 없는 곳에서 눈치껏 마스크를 벗고 신선한 공기를 가슴 깊이 들이마셨다.

겨울철 수목원은 푸르고 풍성한 나무들이 어우러진 숲이라기보다는 헐벗은 나무들로 쓸쓸해 보였다. 그러면서도 수목원의 체면을 지키려는 듯이 침엽수들은 황량한 겨울철 수목원 풍경을 푸르게 지키고 있었다.

광릉 국립수목원의 나무들은 보통 침엽수와 활엽수로 분류되는데 활엽수의 큰 잎은 가을과 겨울에 다 떨어져서 가지만 앙상하게 남는데 비해서 침엽수의 가늘고 긴 잎은 겨울이 와도 여전히 푸르기 때문에 상록수라고도 한다.


수목원의 실내 전시실을 들러 나무와 숲에 대한 설명을 보고 본격적인 수목원 탐방에 나섰다. 흙길을 지나 나무 데스크가 깔려 있는 숲 생태 체험 길을 따라 걷다가 보니 늘 푸른 바늘잎나무, 섬잣나무, 솔송나무, 구상나무, 금방 향나무에서 쏟아내는 신선한 피톤치드가 내 몸 안에 스며들었다.

숲이 내뿜는 신선한 공기를 긴 호흡으로 마음껏 들이마셨다.


걸음을 잠시 멈추고 숲 사이로 볼품없이 서 있는 고사목을 보았다.

고사목은 나무에 병이 들거나 산불, 노화 등으로 인해 서 있는 상태에서 말라죽은 나무라고 한다.

예전에는 병해충의 우려 때문에 제거했으나, 요즈음에는 죽은 자신의 몸에 이끼가 살게 하고 밑동에는 버섯류가 자라게 하여 숲 생태계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한다.


볼품없이 말라서 비틀어진 쓸모없는 나무라고만 생각했었는데 고사목의 역할에 대한 안내 글귀를 보고 건강한 숲이 이루어지는 생태계의 비밀을 안 것 같았다.

자연에 순응하는 숲 생태계의 모습에서 순수하고 희생적인 삶의 교훈을 느낄 수 있었다.


흔히들 “부모님의 내리사랑은 있어도 자식이 부모에 대한 치사랑은 없다.”라고 하지만 숲을 이루는 생태계는 내리사랑과 치사랑이 어우러져 있는 것 같다.

우리들의 삶에서 부모님들의 아가페적인 내리사랑에 감화된 자녀들의 치사랑이 샘솟으면 살맛 나는 세상이 될 것 같다.


숲길을 거닐며 문득 돌아가신 어머니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소풍날 어머니가 정성스럽게 싸준 김밥이 가난한 집의 김밥으로 보일까 봐 창피해서 친구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던 내 모습이 고사목에 피어난 버섯 같았다.


수목원 탐방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어머니가 싸준 김밥을 먹고 싶은 충동이 느껴졌다.

영문도 모르는 아내에게 김밥을 해달라고 졸라댔다.

어머니 김밥과 똑같은 맛은 아니어도 아내의 정성이 담긴 아내표 김밥도 맛이 있었다.


세상 이치를 일깨워준 고사목처럼 숲의 자연스러움은 내 삶이 순수할수록 행복은 가까운데 늘 함께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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