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렴치한

#3

by 삼류작자

1997년 3월, 경마장.

경기가 끝나자 소리는 갑자기 가벼워졌다.

방금 전까지 관람석을 채우던 함성은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사람들은 각자의 패배를 들고 흩어졌다.

남은 것은 눅눅한 바닥과 밟힌 종이컵, 말들이, 군중들이 남기고 간 열기뿐이었다.

상훈은 아직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작업복처럼 생긴 점퍼 소매에는 먼지가 말라붙어 있었고, 손등에는 오래된 상처 자국들이 겹겹이 남아 있었다.

무언가를 나르고, 조이고, 들춰본 사람의 손이었다.

몸보다 눈이 먼저 날카로워져 있었다.

충혈된 눈동자 안에서 분노와 초조가 번갈아 튀었다.

이유는 없었다.

오늘은 그저 무엇이든 부숴야 할 것 같았다.

사람들이 거의 다 빠져나갈 무렵,

왜소한 노신사가 스치듯 어깨를 지나쳤다.

상훈은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들었다.

굳이 돌아볼 필요도 없는 일이었지만, 그는 일부러 눈을 부라리며 몸을 돌렸다.


“야이, 씨발.”

짧은 말.

목소리는 낮았지만, 안에 담긴 것은 가벼운 시비가 아니었다. 상대가 입을 열기도 전에 상훈은 한 발 더 다가섰다. 말보다 손이 먼저 나갈 것 같은 거리였다.


“야이 씨발, 왜 치는 건데? 어! 씨발, 어쩌자는 거냐고~!”

상훈이 억지를 부리고 있는 그 순간,

굵은 목소리에 등 뒤의 공기가 미세하게 갈라졌다.


“저기 거기~ 여기! 여기! 좀 봅시다.”

낮고 느릿한 목소리였다.

상훈이 돌아보자, 창석이 그의 얼굴을 한 번 훑어보고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맞네. 여기 딱 있네!!”

그가 고개를 까딱였다.


“고객님. 거기서 화내지 마시고, 이쪽 이쪽으로 오시죠.”

사채업자 창석이었다.

상훈은 그를 보는 순간, 몸이 먼저 반응했다.

어깨에 들어가 있던 힘이 스르르 빠졌다. 방금 전까지 부풀어 있던 기세는 순식간에 꺼졌고, 시선은 바닥으로 떨어졌다.


“저기요.”

노신사가 창석을 바라보자, 창석이 시선을 주지 않은 채 나긋하게 말했다.


“가시던 길 가세요.”

부하 중 하나가 상훈을 향해 이쪽으로 오라는 듯 손짓했다.

텅 빈 관람석 한가운데, 정장 차림에 선글라스를 낀 창석이 다리를 꼬고 앉았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옆자리를 손바닥으로 툭, 쳤다.

상훈은 급히 다가갔지만, 앉지 못한 채 그 앞에 멈춰 섰다.

다시 한번.

옆자리를 툭.

그때 덩치 중 하나, 동기가

낮고 눌러 찍는 목소리로 말했다.


“앉아.”

상훈은 그제야 몸을 접듯 자리에 앉았다.

창석이 상훈의 옷매무새를 고쳐주며 웃었다.

웃음에는 살이 없었다.


“아, 또 뭐가 그렇게 화가 나셨어.”

잠깐 숨을 고른 뒤, 느릿하게 덧붙였다.


“돈 떼인 나도 아직 화 안 났는데.”

그는 관람석 아래를 한 번 훑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만 오면 참 신기해.. 우리 고객님들을 이렇게 우연히 한 분씩 만나게 된다니까.”

창석은 무릎을 가볍게 탁 치며 고개를 갸웃했다.


“어디 보자…”


“우리 고객님 성함이 어찌 되더라. 사람 얼굴은 귀신같이 기억하는데… 이름은 영 약해서.”

상훈은 입술을 한 번 달싹였다가, 말없이 삼켰다.

숨이 목에 걸린 듯, 한 박자 늦었다.

그 모습을 보던 동기가 재촉하듯 말을 던졌다.

목소리는 낮았고, 선택지는 없었다.


“이름!”

상훈은 그제야 고개를 더 숙였다.


“저… 정상훈입니다.”

그 순간,

창석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덩치 중 하나인 동기를 바라봤다.

짧게, 고개를 까딱였다.


“동기야. 서류.”

험한 인상과는 어울리지 않게, 동기는 귀여운 곰이 그려진 스웨터를 입고 있었다.

그는 말없이 가방을 뒤적이더니 노란 파일철 하나를 꺼내 건넸다.

창석은 파일을 받아 들고 천천히 훑었다.


“어디 보자... 맞네 정상훈 씨”

몇 장을 넘기는 동안, 종이가 바람에 팔락였다.


“아---이제 우리 못 기다려요.”

목소리는 낮고 평평해졌다.


“이자는 밀리면 안 되잖아요. 그죠?”

손짓하자 부하 중 한 명이 계산기를 내밀었다.

이 순간 상훈의 운명을 결정하듯 파일철 속 종이가 바람에 팔락였다.


“원금 오백.”

싸구려 계산기 소리와 함께 창석이 중얼거린다.


“어디 보자… 날짜가... 미납 이자 포함해서… 천 오백. 또 이렇게 출장 나와서 찾게 됐으니 출장비 백.”

창석은 정리가 됐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나쁜 사람 아니잖아요.”

“생면부지의 정상훈 씨한테 필요한 돈 빌려주고, 날짜 정하고, 할부까지 해주고.”

잠깐 멈췄다가, 낮게 덧붙였다.


“근데 씨발, 돈을 빌려가서 안 갚아.”

“내 피 같은 돈을.”

시선이 상훈에게 꽂혔다.


“그럼 난 호구인가요?”

상훈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침만 삼켰다. 입 안이 바싹 말라 있었다.

창석은 옷매무새를 한 번 정리하듯 만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동작 하나로 주변의 공기가 눈에 띄게 무거워졌다.


“그러지 말고.”

그는 품에서 명암 하나를 꺼내 상훈 앞으로 내밀었다.


— 장기 기증 알선 —

그 뒤에 겹쳐져 딸려 나온 또 다른 명암.

— 해외 여성 취업 알선 / 선수금 최소 이천만 원 —


“콩팥 하나 뗍시다. 안구도 괜찮고. 안구면 웃돈도 드릴 수 있겠네.”

받아 든 선전지 같은 명암을 내려다보던 상훈의 얼굴이 순식간에 질렸다.


“시설이 뭐 최고는 아닌데, 수술은 잘해. 오늘은 일단 같이 갑시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상훈은 바닥으로 무너졌다.

의자에서 내려온 것이 아니라, 떨어진 것에 가까웠다. 그는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사장님… 제발요.”

다급함에 목소리가 갈라졌다.


“최대한 빨리 갚겠습니다. 진짜로요.”

창석은 고개를 돌려 부하들을 보았다.

의아하다는 듯 혀를 찼다.


“어어, 쓰읍… 얘 왜 이러냐.”

그리고 상훈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비즈니스 하자는데 또 이러네.”

맨바닥에 무릎을 꿇고, 코를 박듯 빌던 상훈의 시선이 자신의 손에서 떨어져 바닥에 흩어진 명암 중 하나에 멈췄다.

조금 전 건네받았던 그 종이였다.


— 해외 여성 취업 알선 / 선수금 최소 이천만 원 —

상훈은 그것을 주워 들었다.


“사장님, 이거… 이것도 사장님 사업이시죠.”

말이 엉켰다.


“이걸로 취업받아서… 그걸로 탕감하겠습니다.”

창석이 피식 웃으며 돌아섰다.

동기가 웃음을 섞어 거들었다.


“어이, 여.성. 해외 취업 알선 안 보여?”

상훈은 고개를 들고, 돌아서는 창석을 향해 거의 외치듯 말했다.


“제 마누라… 제 마누라가 갑니다.”

숨을 고르고 덧붙였다.


“지금이라도 당장 데리고 오겠습니다.”

잠시, 아무 말도 오가지 않았다.

창석은 재밌다는 듯 머리를 긁적이더니 다시 관람석에 앉았다.


“캬… 우리 정상훈 씨.”

창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입꼬리만 올라간 웃음이었다.


“엄청난 분이시네.”

“세상 씨발… 개 씨발, 악덕 사채업자도 형님 하겠어.”

그는 호기심이 생긴 사람처럼 상훈의 얼굴을 잠시 가만히 들여다봤다.

사람을 셈하는 눈이었다.

별의별 인간을 다 봐왔지만, 이 정도는 처음이라는 눈빛.


“이야…”

잠시 바라보다 짧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감탄이라기엔 서늘했고, 혀를 차는 소리에 가까웠다.


“사진 있어?”

상훈은 그 말에 허둥지둥 지갑을 꺼냈다.

손이 떨려 지갑이 제대로 열리지도 않았다.

지갑에서 의미 없는 마권 몇 장이 바닥에 떨어졌다. 몇 번이나 뒤진 끝에, 증명사진 한 장을 꺼내 내밀었다.

-정숙의 증명사진-

창석은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눈빛이 잠깐 멈췄다.

무언가 인정한다는 듯 입술을 삐죽 내밀고 고개를 끄덕이며 사진과 상훈을 번갈아 보며 혼잣말을 한다.


“이야... 괜찮네.”

사진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낮게 덧붙였다.


“그런데.. 우리 부인분이 가시려나?”

상훈을 똑바로 바라보며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내가 비즈니스 하는 사람이지.. 인신매매범 같은 그런 파렴치한은 아닌데.”

상훈은 기다렸다는 듯 말을 쏟아냈다.


“갑니다. 제가 가라면, 무조건 갑니다.”

숨을 고르지도 않았다.


“우리 집사람, 고아입니다.”

“부모도 없고, 형제도 없어요.”

말이 빨라졌다.


“제가 데려 보내면, 찾을 사람도 없습니다.”

“괜히 문제 될 일도 없고요.”

말이 이어지며 잠깐 웃는 것 같기도 했다.


“어차피 저 아니면 갈 데도 없는 사람입니다.”

“일하러 가는 거잖아요. 좋은 데로요.”

창석의 표정을 살폈다.


“제가 책임집니다.”

“반드시, 지금 당장이라도 데리고 오겠습니다.”

자신의 말에 확신을 가진 듯 덧붙였다.


“도망 안 갑니다.”

“그럴 사람 아닙니다.”

말이 엉켰다.


“아니… 도망갈 데도 없습니다.”

창석은 그 말을 듣다 말고 잠시 생각하더니, 옆에 있던 동기에게 손짓했다.

동기가 얼굴을 가까이 댔다.

낮고 감정 없는 목소리.


“배 언제 떠난데?”


“아마 내일 새벽에 떠나지 싶습니다.”


“아직 머릿수 많이 부족한 데지?”


“네. 엊그제 팔계형님이 보낼 사람 없냐고”

창석은 혀를 찼다.


“쓰읍….”

다시 상훈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우리 상훈 씨를 내가 한 번 더 믿고.”

말끝을 조금 늘였다.


“부인분, 오늘 밤에 모시고 가는 걸로 할까요.”

짧은 침묵. 창석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대신.”

잠깐 뜸을 들였다.


“약속 안 지키거나, 도망가면.”

말을 멈췄다. 굳이 이어가지 않아도 될 만큼의 공백이었다.


“비즈니스는 끝난 겁니다.”

손바닥을 펴 보였다.


“회사 관두고, 이사 가고, 어디 숨어 살아도. 결국 다 여기. 요 손바닥 안이에요.”

상훈은 다급하게 말했다.


“절대… 그럴 일 없습니다.”

급히 덧붙였다.


“진짜로요.”

잠깐, 말을 멈췄다.

손에 쥔 명함을 다시 내려다보았다. 종이를 펴지도 못한 채, 가장자리를 구기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사장님…”

마른침을 삼켰다.


“여기… 선수금이 이천이라고 적혀 있어서요.”

잠깐 웃는 것처럼 보였다. 웃음이 아니라, 습관에 가까운 표정이었다.


“제가… 갚을 돈이 천육백이 면…”

말끝이 흐려졌다.

상훈은 명함을 내려다보며, 거의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사백은… 돌려주시는 건지…”

창석이 잠깐 상훈을 보더니, 다음 순간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곧 부하인 동기까지 웃음이 번졌다.

웃음이 가라앉기도 전에 말했다.


“당연히 드려야지.”

손을 내저었다.


“사백. 당연히 드려야지.”

그는 웃음기를 얼굴에 남긴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시종일관 무표정이던 부하 중 하나인 망치를 흘끗 보며 말했다.


“알지?”

망치는 대답 대신 고개를 한 번 숙였다.

창석은 동기를 데리고 천천히 자리를 떠났다.

멀어지는 동안에도 실소 같은 웃음소리가 몇 번 더 흘러나왔다.




잠시 뒤,

관람석에는 상훈과 다부진 체격의 망치만 남았다.

상훈은 어정쩡하게 몸을 일으켰다.

자리를 털고 몇 걸음 옮기다 말고, 슬쩍 망치의 눈치를 보듯 돌아봤다.

창석과 함께 있을 때는 아무 표정도 없던 망치가, 입꼬리를 섬뜩하게 씨익 끌어올렸다.

그는 입을 쩍 벌려 잘린 혀를 드러내 보이더니,

신경 쓰지 말고 앞장서 가라는 듯 손끝으로 가볍게 까딱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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