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해상

#11

by 삼류작자


밤새 눌려 있던 어둠이 밀려나듯, 바다는 서서히 빛을 받아내고 있었다.

여자들은 작은 갑판 한쪽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었다.

누군가는 담배를 피웠고, 누군가는 물을 마셨고,

또 누군가는 이유 없는 투덜거림을 중얼거렸다.

긴장도 체념도 아닌, 밤을 다 써버린 사람들 특유의 축 늘어진 숨이었다.

팔계의 부하 하나는 말없이 낚싯대를 바다로 드리우고 있었다.

툭, 툭— 파도에 맞춰 줄이 흔들렸다.

선장은 키를 잡은 채 힐끔힐끔 여자들을 훔쳐보다가,

괜히 혜린 쪽을 향해 짓궂은 농담 하나를 던졌다 어린 여자애의 날 선 반응에

웃음인지 헛웃음인지 모를 소리가 잠깐 흘렀다.

그때였다.

갑판 난간에 기대 서 있던 팔계가 바다 저편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눈을 가늘게 뜨며 중얼거렸다.


“오.”

잠시 후, 확신이 섞인 목소리가 이어졌다.


“왔다. 왔다.”

팔계는 키를 잡고 있던 선장 쪽으로 휘적휘적 다가가 손가락으로 바다 저편을 가리켰다.


“저짜 보이네. 저쪽으로..”

육십이 넘어 보이는 선장은 힐끗 보고는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아이고, 지금도 그리 가고 있구만. 거참 신경 안 써도 된다카이.”

어둠 속에서 점처럼 보이던 어선 한 척이 서서히 윤곽을 드러냈다. 파도 사이를 가르며 다가오던 배는 이내 속도를 늦추더니, 두 배의 선수가 나란히 맞닿았다.

저쪽 배에서 닻줄이 던져졌다. 밧줄이 공중에서 한 번 튀고, 팔계의 부하가 잽싸게 받아 배기둥에 감아 걸었다. 줄이 팽팽해지자 두 배는 같은 숨소리를 내며 고정됐다.

그때, 맞은편 배에서 먼저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둠을 배경으로 서 있는 실루엣부터가 묵직했다.


미즈하라 렌조였다.

검은 재킷 위로 바닷바람이 스치고 지나갔다. 단정하게 빗어 넘긴 머리, 굳이 힘을 주지 않아도 느껴지는 체격. 선상 위에 올라서는 순간, 그는 주변을 둘러보지도 않고 자연스럽게 중심을 차지했다. 표정은 무덤덤했지만, 눈빛은 계산처럼 차분했다.

말수가 적을 것 같은 얼굴, 그러나 한마디가 상황을 정리해 버리는 종류의 인간이라는 게 단번에 느껴졌다.

그의 뒤로 한 박자 늦게 또 다른 남자가 따라 넘어왔다.

가네다 쇼이치였다.

렌조보다는 마른 체구였지만, 몸놀림이 날쌔고 눈이 빠르게 움직였다. 바다와 사람, 여자들까지 한 번에 훑어보는 시선이었다. 그는 말없이 렌조의 반걸음 뒤에 섰다. 주인을 드러내되, 스스로는 그림자에 머무는 위치였다.

팔계는 나름 예의 바르게 자세를 고쳐 잡았다.


“아… 렌조상. 사시부리 오하요… 아, 다이조부데쇼?”

팔계는 어색하게 웃으며 인사를 마치고, 뒤에 서 있던 부하를 향해 손짓했다.


“야, 커피 한 잔 타와라.”

하지만 렌조는 팔계 쪽을 거의 신경 쓰지 않았다.

갑판에 올라서자마자 시선을 여자들 쪽으로 옮겼다.

젖은 갑판, 새벽의 냉기, 웅크린 어깨들.

한 명 한 명을 훑는 눈길에는 감정이 없었다.

사람을 보는 눈이 아니라, 물건을 확인하는 눈이었다.

그 사이 쇼이치가 팔계 쪽으로 몸을 돌렸다.

팔계가 커피 이야기를 꺼내려는 순간, 재일 2세인 쇼이치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커피는 괜찮습니다”

완벽하진 않지만 뜻은 분명한 한국어 억양이었다.

팔계는 머쓱하게 웃으며 선장실 쪽으로 돌아섰다.

가방을 뒤적이다가 서류뭉치 하나를 꺼내 들었다.

여자들의 이름, 나이, 출신지가 적힌 종이들을 쇼이치에게 건넸다.


“여기 인적사항.”

쇼이치는 서류를 받아 들고 천천히 넘겼다.

눈은 빠르게 움직였고, 손놀림은 익숙했다.

그때였다.

여자들을 훑던 렌조의 시선이 한 지점에서 멈췄다.

조금 떨어진 곳, 가방을 무릎에 꼭 끌어안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던 정숙이었다.

다른 여자들처럼 화장을 한 얼굴도 아니었고,

수수한 복장에 한 번 꾸며본 적 없는 여자의 얼굴이었다.

이 배에 실린 여자들 사이에서, 그녀만 다른 부류의 여자처럼 보였다.

렌조는 잠시 더 바라보다가, 아무렇지 않게 쇼이치를 불렀다.


“……これ。"

"(……저 여자.)”

그는 턱으로 정숙을 가리켰다.


“人身売買も、混じってるのか。"

"(인신매매도 섞여 있나?) ”

쇼이치의 손이 잠깐 멈췄다.

그는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팔계를 향해 물었다.


“이 여자… 납치 같은 거 해서 온 거예요?”

팔계는 그제야 렌조의 시선이 어디에 꽂혀 있었는지 알아차렸다.

머리를 긁적이며


“아, 그런 건 아니고.”

잠깐 말을 고르다 덧붙였다.


“거 가족이… 가족이 팔아먹은 여잔데.”

쇼이치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렌조를 향해 말했다.


“家族に売られたそうです”

(가족에게 팔렸다고 합니다.)

렌조는 더 묻지 않았다.

사실 그에겐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였다.

종류가 다른 인간이 섞여 있어 잠시 호기심이 생겨 물어봤을 뿐이었다.

정숙을 향해 두고 있던 시선을 거두고,

이미 결론이 내려진 일이라는 듯 몸을 돌렸다.

밧줄을 잡고 다시 맞은편 배로 건너가며,

낮게 말했다.


“おい、ショウイチ。移せ。”

(어이, 쇼이치. 옮겨.)

그게 전부였다.

선장실 앞 갑판 위에서는 쇼이치와 팔계가 남은 거래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서류와 돈, 확인과 확인이 빠르게 오갔다.

긴 이동으로 쌓인 피로가 쓸데없는 말을 덜어내고, 일을 서두르게 만들고 있었다.

말은 간결했고, 감정은 없었다.

그들이 마지막 확인을 끝낼 즈음,


“야야 퍼뜩 가그러 아가씨들 옮겨 태워삐라.”

팔계가 부하들에게 여자들을 어서 일본 배에 보내라는 듯 손짓했다.


“자, 자. 이쪽으로.”


“짐 챙기고.”

그 지시에 따라 여자들은 하나둘, 반대편 배로 옮겨 탔다.

두 배를 잇는 밧줄 위에서 발밑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러나 바다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잔잔하게 출렁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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