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른하게

#29

by 삼류작자


6월이 되자 동백나무 잎은 두껍고 윤기 있는 짙은 녹색으로 반들거렸다.

햇빛이 닿으면 잎맥 위로 빛이 미끄러지듯 흘렀다.

바람이 스치면 잎들이 낮게 부딪히며,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듯 소리를 냈다.

유리코는 언제나 예고 없이 불쑥 찾아왔다.

대문을 열고 들어와 혼잣말처럼 이야기를 늘어놓다가,

어느 날은 부엌에 서서 무언가를 만들고,

또 어느 날은 다다미 위에 그대로 누워 낮잠만 자고 돌아갔다.

정숙은 그 방문들의 시작과 끝을 정확히 기억하지 못했다.

유리코의 목소리와 냄비 소리,

창문을 여닫는 소리만이 시간처럼 스며들었다 빠져나갔다.


사진관을 다녀온 이후 렌조는 정숙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지 않았다.

그녀가 문 근처에만 가도 몸이 먼저 굳는 모습을 보며

괜히 흔들어 놓은 감각이 뱃속까지 전해질 것만 같았다.

그래서 집 안의 시간은 늘 같은 결로 유지되었다.

정숙의 배는 어느새 조금 더 눈에 띄게 둥글어져 있었고,

숨을 들이쉴 때,

몸을 돌릴 때마다 무게가 아주 조금씩 따라왔다.

손을 얹으면 따뜻했고, 그 안에서 미세한 기척이 느껴질 때도 있었다.




병원은 따로 다닐 수 없었지만

유리코가 잘 아는 한방의사가 몇 차례 들렀다.

낯선 손이 손목을 잡는 순간마다 정숙의 몸은 반사적으로 굳었다.

그래서 방문은 늘 짧았고,

의사는 맥을 짚고는 오래 머물지 않았다.

다행히도 산모도 건강하고

이대로면 아이도 건강하게 나올 것이라 했다.




그 무렵 정숙의 기억들은 선명한 것부터 먼저 사라져 있었다.

이름, 장소, 시간 같은 것들이 혼란스럽게 남아 있던 것조차 지워졌다.

일본에 오기 전의 일들은 애초에 없었던 것처럼 느껴졌다.

무언가를 잃어버렸다는 감각조차 없었다.

다만, 깊이 생각하려 하면 머릿속이 천천히 잠기는 느낌이 들었고

그 순간 정숙은 더 이상 안으로 들어가지 않으려 했다.

정확히는 기억을 지운 것인지,

기억이 스스로 물러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생명을 잉태한 어미의 본능이 견디기

어려운 것들을 밀어내도록 선택한 결과처럼 보였다.

그 덕분인지 마음은 이상할 만큼 고요했다.

불안은 있었지만 날카롭지 않았고,

두려움도 깊이 가라앉아 파문만 남겼다.


정숙의 세계는 지금 손에 닿는 것들,

눈앞에서 천천히 변하는 빛의 결,

몸 안에서 오르내리는 미세한 감각들로만

조용히 이어지고 있었다.

그렇게 나른하게 6월이 흘러갔다.

이전 28화외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