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적지

#43

by 삼류작자


유리코가 사다 준 운동화와 헐렁한 원피스. 손에는 한국에서부터 들고 온 가방, 그리고 준페이가 쥐여준 만 엔짜리 지폐 몇 장이 들려 있었다. 임신한 배는 출산이 멀지 않았음에도, 다행히 걸음을 옮기기엔 무리가 될 만큼 크게 부풀어 있지는 않았다.

정숙은 한동안 그 자리에 멈춰 선 채 그대로 바다를 바라보았다.


낯선 땅.

발을 내딛기도 전에 두려움이 앞섰다. 몸이 먼저 조심스러워졌다. 툭툭 끊겨버린 기억의 틈새로 상훈의 얼굴이 그리움처럼 배어 나왔다. 동시에, 이곳에서 지난 여덟 달 동안 자신을 거두어 주었던 그 남자의 투박한 뒷모습이 상흔처럼 스쳤다. 그 생각들이 겹치는 사이, 배 안쪽에서 움직임이 한 번 지나갔다. 정숙은 반사적으로 허리를 곧게 세웠다.


정숙은 천천히 바다를 등지고 발걸음을 옮겼다.

해안도로는 끝이 보이지 않게 길게 뻗어 있었다. 몇 걸음만 옮겨도 숨이 미묘하게 달라졌다. 평소보다 짧아진 호흡을 들키지 않으려는 듯, 그녀는 고개를 들고 일정한 속도를 유지했다.

표지판에 적힌 일본어는 의미가 아니라 모양처럼 스쳐 지나갔다.

아스팔트 위로 햇빛이 내려앉아 아지랑이를 만들었고, 멀리서 트럭 한 대가 지나갈 때마다 바닷바람과 함께 매캐한 냄새가 섞여 왔다. 그때마다 배가 미세하게 당겨 왔다. 정숙은 걸음을 잠시 늦추었다가, 다시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속도를 맞췄다.


목적지도 없었지만 그녀는 계속 걸었다. 자동판매기 몇 대가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도로 옆으로는 문 닫힌 창고 같은 건물, 출입구만 과하게 높은 주차장이 이어졌다. 걸음을 옮길수록 사람들의 흔적이 짙어졌고, 그만큼 비릿한 바다 냄새는 점점 옅어져 갔다.

어느 순간, 길은 건물들 사이로 파고들었다.


오밀조밀 붙어 선 건물들.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것이 익숙한 듯 생경했다. 그 낯섦들은 호기심보다는 경계와 두려움에 가까웠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정숙은 풍경에 동화되어 가는 자신을 느꼈다. 몸은 자꾸만 멈춰 쉬고 싶다고 신호를 보냈지만, 의식은 계속 앞으로를 재촉했다.

한 번씩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에 몸은 본능적으로 움츠러들었다. 배를 보호하듯 팔꿈치가 안쪽으로 말렸다. 하지만 의식은 오히려 온기가 느껴지는 인파 쪽으로 향했다. 누구도 말을 걸지 않았고, 누구의 시선도 그녀에게 특별히 오래 머물지 않았다. 그 무관심이, 정숙에게는 오히려 안도가 되어 돌아왔다.


자동차 경적 소리.
자전거 벨 소리.
신호등이 바뀌는 전자음.
어디선가 흘러나오는 상점의 음악.


정숙은 도시의 소음이 짙어지는 쪽으로 계속해서 걸음을 옮겼다. 그 사이 배 안에서 느릿한 파동이 한 번 더 지나갔다. 그녀는 잠시 멈춰 서서 가볍게 숨을 고른 뒤, 다시 걷기 시작했다.

상점들이 보였고, 지하철 출입구가 나타났다.

사람들이 갑자기 더 많아졌다.


관광객들.
근처에서 일하는 사람들.
장바구니를 든 노인들.


그 흐름 속에 몸을 맡긴 채 또 한참을 걷다가 문득 멈춰 섰다. 멈추자마자 허리 아래로 무게가 한꺼번에 내려앉는 듯 불편하게 느껴졌다.


의미를 알 수 없는 글씨로 가득한 간판들.
겹쳐 들려오는 사람들의 말소리.

사람들은 저마다 분명한 목적지를 향해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오직 자신만이 목적 없이 이 거리를 부유하고 있다는 자각이 해일처럼 몰려들었다. 막막함 속에서 문득 그 남자가 떠올랐지만, 그와는 상관없는 아이라는 듯 배 안쪽에서 또 한 번 확실한 움직임이 느껴졌다.


‘한국으로 돌아가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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