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땅

#44

by 삼류작자


오사카시 주오구 니시신사이바시 1초메, 미츠공원(三角公園). 사람들은 이곳을 ‘산카쿠코엔’이라 불렀다. 이름 그대로 거리의 모양에 맞춰 삼각형으로 잘려 나간 보잘것없는 땅이었지만, 번잡한 아메리카무라의 한복판에서만큼은 섬 같은 휴식처가 되어주는 곳이었다.


정숙은 공원 가장자리를 따라 길게 늘어선 콘크리트 구조물 위에 걸터앉았다. 엉덩이를 붙이는 순간, 부른 배가 아래쪽으로 묵직하게 쏠리며 치골을 압박했다. 그녀는 짧은 숨을 고르며 무심한 얼굴로 자세를 고쳐 앉았다. 굳은 시멘트 덩어리 위로 사람들이 띄엄띄엄 자리를 잡고 있었다. 혼잡한 거리와 맞닿은 그곳에서 정숙은 무릎 위에 가방을 올렸다. 배가 눌리지 않도록 가방을 조심스레 비껴 세운 뒤, 주위를 살피며 지퍼를 열었다.

가방 속 낡은 옷가지 위로 렌조에게 받아 넣어둔 신분증과 여권, 묵직한 하얀 봉투가 차례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준페이가 건네받아 넣어둔 지폐들이 어지럽게 섞여 있었다. 정숙이 가방 안으로 손을 깊숙이 밀어 넣은 순간, 배 안쪽에서'툭'하고 미세한 파동이 일었다. 아이의 태동이었다. 그녀는 멈칫하며 숨을 죽였다가, 이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만 엔짜리 지폐 한 장을 움켜쥐었다.

가방을 품에 꼭 안은 채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시선은 한 곳에 머물지 못하고 불안한 마음을 닮아 위태롭게 흔들렸다. 어쩌다 누군가와 눈이라도 마주칠라 들면 곧바로 시선은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


해가 아직 지지 않은 오후.

그녀의 눈에 들어온 풍경은 공원 나무 그늘 아래에는 젊은 남녀들이 어깨를 맞댄 채 앉아 있었고,한쪽에서는 사내 하나가 기타를 튕기며 아무도 듣지 않는 노래를 불렀다.주변의 낮은 건물 벽면에는 낙서와 스티커가 겹겹이 엉겨 붙어 있었고,의류점과 레코드숍들이 경계 없이 다닥다닥 이어져 저마다의 소음을 내뱉었다.

몇 걸음 떨어진 자리에 또 다른 남녀 한 쌍이 다가와 자리 잡았다. 음식을 나눠 먹으며 터뜨리는 웃음소리가 공기 중으로 번졌다.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그녀는 마른침을 삼켰다. 한 번씩 배 근육이 팽팽하게 당겨왔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주변을 다시 살폈다. 그때, 길 건너편의 선명한 간판 하나가 시야에 들어왔다. 유리문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편의점이었다.


문이 열리고 닫힐 때마다 사람들이 차가운 음료를 들고 나왔고, 누군가는 가게 앞에서 익숙하게 담배 비닐을 벗겨내며 불을 붙였다. 정숙은 그 모든 장면을 외우기라도 하듯 눈에 담았다. 그 사이, 뱃속을 느릿하게 밀어내는 감각이 느껴졌다. 정숙은 반사적으로 배 위에 손을 얹었다가 곧바로 거뒀다. 이윽고 결심한 듯, 손바닥 안의 지폐를 더 세게 움켜쥐었다.

그녀에게는 눈앞의 편의점으로 향하는 것조차 도전이었다.

한동안 자리를 잡고 앉아 있는 동안 마음은 자꾸만 안으로 움츠러들어버렸고,겨우 엉덩이를 붙인 이 자리를 떠나 다시 걸음을 뗀다는 것.그것은 간신히 찾아낸 이 익숙한 장소로부터의 또 다른 이탈을 의미했다.


그녀는 가방을 몸 쪽으로 바짝 끌어당기며 간신히 일어섰다. 몸을 일으키는 것만으로도 허리 아래로 둔직한 하중이 느껴졌다.

발걸음은 편의점을 향해 고정했지만, 시선은 자꾸만 사람들을 피해 바닥으로 떨어졌다. 타인들의 바쁜 행렬이 그녀의 곁을 무심히 스쳐 지나갔다. 불안한 걸음은 흐름에 섞이지 못했고, 그 순간 맞은편에서 오던 젊은 남성과 어깨가 툭, 부딪혔다.

충격이 배 쪽으로 울리자 숨이 멎는 듯했다.


“……何だよ (뭐야…).”


남자는 인상을 쓰며 돌아봤다가 임신한 그녀의 배를 보고는 인상만 한 번 더 구긴 채 말없이 시선을 거두고 지나갔다.

사람들 틈 속에서 그녀는 굳은 표정으로 오직 편의점을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짤랑—


작은 종소리와 함께 편의점에 들어서자 에어컨이 내뱉는 건조하고 냉랭한 공기가 피부에 닿았다. 갑작스러운 한기에 배가 수축하는 느낌이 들어, 그녀는 잠시 멈춰 서서 가쁜 숨을 골랐다.

도시락 진열대 앞에서 멈춰선 그녀는 눈으로 가격표를 하나하나 더듬었다. 손에구겨진 지폐를 펼쳐 자릿수를 확인한 뒤,렌조가 사다 주곤 했던 것과 비슷한 도시락 하나와 물병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다른 물건을 고르듯 살피며 계산대 쪽에 서 있는 사람들을 유심히 지켜봤다.

돈을 내는 순서, 물건을 받는 타이밍. 그 모든 과정을 머릿속으로 예습한 뒤에야 계산대 앞에 섰다. 고개를 숙인 채 물건을 올려두자 점원의 빠른 일본어가 날아왔다. 뜻은 몰라도 자신을 향한 물음이라는 것만은 분명했다. 대답 대신 그녀는 손안에 구겨진 만 엔짜리 지폐를 내밀었다.

삑, 삑— 기계적인 소음 끝에 점원이 다시 물었다.


“袋に入れますか (봉투에 담아드릴까요)?”


그녀는 여전히 입을 꾹 다문 채 바닥만 보았다. 점원의 시선이 어딘가 불안해 보이는 그녀를 살피더니 잔돈을 내밀며 나직하게 덧붙였다.


“……大丈夫ですか (……괜찮으세요)?”


정숙은 물건을 낚아채듯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점원의 목소리를 등진 채 도망치듯 가게를 빠져나왔다.



결국 그녀는 다시 공원의 그 자리로 돌아왔다.

역시 잠시라도 머물렀던 곳이 주는 안정감이라는 게 있는 모양이었다.

성급한 손놀림으로 물병을 따고 차가운 물을 연달아 들이켰다.목줄기를 타고 내려가는 감각에 비로소 막혔던 숨이 터져 나왔다.

허기 탓인지 저도 모르게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조심스레 도시락 뚜껑을 열자 간장에 졸인 고기 몇 점과 샛노란 달걀말이,선명한 빛깔의 절임 반찬이 가지런히 모습을 드러냈다.구성은 조금 다르지만 남자의 집에서 수 없이 먹어 본 익숙한 도시락이었다.그녀는 나무젓가락으로 굳은 밥덩이를 떠 입 안으로 밀어 넣듯 삼켰다.

하지만 음식을 씹는 동안에도 불안한 마음을 대변하듯 그녀의 시선은 가만있지 못했다.

사람들이 지나갈 때마다,웃음소리가 스칠 때마다 주위를 경계하듯 불안정하게 옮겨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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