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삐링- 삐링- 삐링- 삐링-.
공기를 날카롭게 긁어대는 벨 소리가 객실 안에 공허하게 울려 퍼졌다. 정숙은 한참 전부터 흐트러진 침대 한 귀퉁이에 걸터앉아 있었다. 시선은 반쯤 열린 커튼 사이, 어제보다 더 낯설게 일렁이는 소에몬초의 풍경의 저만치에 고정되어 있었다. 전화벨은 마치 그녀를 재촉하듯 숨 가쁘게 이어졌지만, 정숙은 평온해 보이기까지 하는 얼굴로 그 소음을 오롯이 견뎌냈다.
한참이 지나서야 정숙은 느릿하게 손을 뻗었다. 수화기를 귀에 가져다 대자, 프런트직원의 기계적인 일본어가 쏟아져 나왔다.
“お客様、チェックアウトのお時間です。1時までにお部屋を空けていただく必要があります。延長をご希望の場合は追加料金が発生いたします。延長されますか?”
(고객님, 체크아웃 시간입니다. 1시까지는 방을 비워주셔야 합니다. 연장을 원하시면 추가 요금이 발생합니다. 연장하시겠습니까?)
수화기 너머로 알아들을 수 없는 일본어가 쏟아져 나왔지만 말의 매듭이 끝날 때까지 듣고 있다가 조용히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제야 정적이 찾아왔다.
그리고, 다시 망부석처럼 앉아 있었다. 미동조차 없는 그녀의 실루엣 위로 정오의 빛이 창밖에서 비스듬히 내려앉았다. 시간이 멈춘 듯한 방 안에서 그녀는 무언가를, 혹은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했다. 화장대 위에는 혜나가 남겨두고 간 삼만 엔이 여전히 외롭게 놓여 있었다. 그녀는 그것이 배신의 대가인지, 최소한의 양심인지 굳이 따져 생각지 않았다.
그저 기다렸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저항이자 순응이었다.
... 얼마나 지났을까.
철컥, 등 뒤에서 도어락이 해제되는 기계음과 함께 문이 열렸다. 곧장 카펫 위를 거칠게 밟으며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정숙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뒤를 확인한들 달라질 건 없었다. 그 발소리의 주인공은 무조건 혜나여야 했다.
정숙은 창 밖을 응시한 채,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를 뱉어냈다.
“혜나 씨…… 전 어차피 선택지가 없어요.”
다가오던 발소리가 멈칫하며 멎었다. 방 안에는 정숙의 담담한 고백 같은 말이 이어졌다. 정숙은 자신의 배 위에 얹은 손에 힘을 주며 말을 이었다.
“그냥 혜나 씨를 믿는 것 말고는, 나에겐 다른 선택지가 없어요.”
등 뒤에서 느껴지는 기척이 미세하게 떨렸다. 정숙은 여전히 앞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은 항복이기도 했고, 혜나의 목을 죄는 가장 지독한 신뢰이기도 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혜나는 침대에 걸터앉은 정숙의 뒷모습을 뚫어질 듯 노려보다가, 항복이라도 한 듯 이내 길게 한숨을 내뱉으며 정숙에게로 다가와 멈춰 섰다. 훔치듯 가져간 돈이 든 백의 무게가 어깨를 짓눌렀지만, 혜나는 일부러 더 심드렁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 언니 봐. 누가 머래.”
혜나가 손에 들고 있던 편의점 비닐봉지를 침대 위로 무심하게 던졌다. 봉투 안에서 오니기리와 샌드위치 몇 개 우유가 쏟아져 나왔다. 이어 제 화장품이 든 파우치까지 툭 던져놓으며 혜나는 괜히 힘주어 말하며 덧붙였다.
“빨리 씻고... 응! 준비해서 나가야 해. 퇴실시간 지나면 연장비 내야 한단 말이야. "
"언니 한국 안 갈 거야?”
그제야 정숙이 고개를 돌려 바라봤다.
거기에는 어제의 화려하고 날 선 옷차림 대신, 헐렁한 후드티에 편한 운동복 반바지를 걸친 혜나가 서 있었다. 화장기 없는 얼굴은 어젯밤보다 훨씬 앳되 보였고, 정숙의 시선을 피하려는 듯 눈동자를 굴리던 혜나가 이내 머쓱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웃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