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로커 박

#49

by 삼류작자


짐승들이 울부짖던 새벽 호텔 루나를 빠져나와 어깨에 맨 백 속에 대충 쑤셔 넣은 돈뭉치를 움켜쥐었을 때, 혜나는 스스로의 얼굴에 침을 뱉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래, 어차피 나 아니었어도 그 여자는 어디 가서 털렸을 거야. 내가 챙기는 게 차라리 나아.’


애써 스스로를 다독이며 녹슨 철제 계단을 올라 제 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방 안의 눅눅한 불빛 아래서 가져온 돈을 한 장 한 장 세기 시작했을 때, 난생처음 느껴보는 불쾌하고 더러운 기분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처음 이 바닥에 발을 들이고, 머리가 희끗한 중년 사내와 잠자리를 한 뒤 그의 지갑을 슬쩍해 도망쳤을 때조차 이런 기분은 아니었다. 그때는 그저 비겁한 안도감과 함께, 어떻게든 해냈다는 비뚤어진 성취감뿐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달랐다. 돈뭉치에 밴 정숙의 절망이 제 손가락을 타고 온몸으로 번지는 것 같았다. 못할 짓이었다.

잠시 눈을 붙이고 일어난 뒤에도 그 끈적한 기분은 사라지지 않았다. 정오 무렵, 편의점에서 대충 끼니를 사 들고 집으로 돌아가려다 혜나는 멈춰 섰다. 자신을 향한 지독한 혐오감이 구역질처럼 밀려왔다. 결국 그녀는 발길을 돌려 호텔 루나로 향했다. 차라리 방이 비어 있기를 바랐다. 그 여자가 겁에 질려 어디론가 도망쳤거나 다른 길을 찾아 떠났기를. 그러면 적어도 이 무거운 양심의 가책에서는 놓여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숨을 몰아쉬며 다시 연 호텔 문 너머로, 정숙은 처음 그 자리에 화석처럼 굳어 앉아 있었다. 마치 혜나가 돌아올 것을, 아니, 돌아와야만 한다는 것을 온몸으로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정숙이 메마른 입술을 떼어 내뱉은 말은 혜나의 가슴을 사정없이 난도질했다.


“나에겐 혜나 씨 말고는 선택지가 없어요.”


그것은 살려달라는 처절한 애원이자, 혜나의 죽어가는 양심 한복판에 박아버린 마지막 대못이었다. 결국 항복한 것은 혜나였다. 그때 왜인지 혜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이 여자를 어떻게든 한국으로 보내주겠노라고.




호텔을 나선 두 사람이 도착한 곳은 혜나가 살고 있는 난바 외곽의 낡은 2층 멘션이었다. 녹슨 철제 계단을 오를 때마다 기분 나쁜 쇳소리가 날카롭게 공기를 긁어댔다. 복도에는 누군가 내놓은 검은 쓰레기봉투가 터진 채 나뒹굴고, 주인 없는 자전거가 먼지를 뒤집어쓴 채 방치되어 있었다. 기름진 음식 냄새와 비릿한 생활취가 눅눅한 공기에 섞여 코끝으로 섞여 들었다. 혜나는 익숙하게 어깨에 두른 작은 백을 뒤져 열쇠를 돌렸다.


“집이 좀 좁아. 한국으로 갈 준비 할 동안만 여기서 지내. 내 집이다 생각하고 편하게 있어. 호텔 방값으로 돈 다 쓰면, 나중에 나 수고비 줄 돈도 없을 거 아냐.”


혜나는 일부러 퉁명스럽게 내뱉으며 정숙을 안으로 밀어 넣었다. 문 안쪽의 풍경은 복도보다 더 어지러웠다. 단칸방이나 다름없는 비좁은 방 안에는 밤거리에서 자신을 돋보이게 하려 치장했던 화려한 옷들이 벽마다 걸려 있었고, 굽 높은 구두와 유행 지난 화장품들이 발 디딜 틈 없이 널려 있었다.

정숙은 혜나가 가리킨 낡은 소파 끝에 조심스럽게 걸터앉았다.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삐걱대는 소리가 났지만, 정숙은 오히려 그 비좁은 방에서 기묘한 안도감을 느꼈다. 그때, 정숙의 시선이 벽 한쪽, 유난히 깨끗하게 닦인 구석에 멈췄다. 거기엔 낡은 사진 한 장이 외롭게 붙어 있었다.

사진 속의 혜나에게선 지금의 날 선 눈빛도, 짙은 화장도 찾아볼 수 없었다. 오사카 경제대학의 교정, 만개한 벚꽃 아래서 책가방을 멘 채 환하게 웃고 있는 단정한 유학생의 얼굴.

건설업을 하며 기세등등했던 아버지는 딸을 일본으로 보내며 가업을 이끌 재원으로 키우려 했고, 혜나 역시 남부러울 것 없는 환경에서 자라 꿈을 안고 현해탄을 건너왔다.

하지만 97년 초부터 한국 경제의 밑바닥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IMF라는 거대한 해일이 덮치기도 전에 혜나의 아버지 회사는 모래성처럼 무너졌고, 송금은 끊겼다. 돌아갈 곳을 잃은 혜나는 그렇게 뒷골목으로 스며들었다. 처음엔 그저 학교를 다니며 살아남기 위한 비굴한 타협이었지만, 몸보다 빠르게 마음이 먼저 허물어졌다. 화사했던 벚꽃 대신 소에몬초의 네온사인 아래서 몸을 파는 길거리의 여자가 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정숙의 시선이 교정 속 해맑게 웃고 있는 사진에서 좀처럼 떨어질 줄 몰랐다. 사진 속의 좋았던 시절은 혜나에겐 이미 전생의 일인 양 까마득했다. 혜나는 먼지 쌓인 비스킷 상자 하나를 가져와 정숙의 앞을 가로막듯 아무렇지 않게 주저앉았다.


“뭘 그렇게 봐. 다 옛날 일이야.”


혜나는 무심하게 비스킷 상자를 열었다. 덜컹거리는 금속음과 함께 뚜껑이 열리며 안을 채우고 있던 잡동사니들이 쏟아져 나왔다. 낡은 가죽 지갑, 큐빅이 박힌 남자들의 시계, 출처를 알 수 없는 라이터들까지. 혜나가 그 난잡한 더미 속을 거침없이 헤집자, 정숙의 것과 같은 붉은색 일본 여권 몇 권이 모습을 드러냈다.

혜나는 익숙한 손길로 여권들을 꺼내 들며 정숙을 힐끗 보았다.


“내가 생각해 봤는데, 언니가 뭐 진짜 일본인도 아니고. 그러니 비자 신청하고 어쩌고 할 입장은 아니잖아.”

그녀는 여권 페이지를 빠르게 넘기며 쓸만한 것을 뒤적였다. 그러다 멈춘 한 권. 여권 속 사진의 주인공이 불쾌하게 떠올랐는지 혜나의 미간이 일순간 일그러졌다. 어느 고약했던 밤의 기억이 스치고 지나간 듯했지만, 그녀는 이내 아무렇지 않다는 듯 표정을 지웠다.


“이게 좋겠다. 오케이... 한국 방문 기록도 많고, 비자 유효기간도 넉넉하고.”


정숙은 그것이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 몰랐지만, 자신감에 찬 표정의 혜나와 눈이 마주치자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혜나는 신이 난 듯 후다닥 움직여 화장대 서랍에서 날카로운 면도날과 반짇고리를 꺼내 왔다.


“지금부터 우리가 뭐 할 거냐면, 언니 여권 첫 장만 그대로 쓸 거야. 사진 붙은 페이지만 남기고 다른 장들은 이 인간 걸로 옮겨서 다시 꿰맬 거야.”


혜나는 마치 짜릿한 놀이라도 시작하려는 아이처럼 샐쭉 웃으며 덧붙였다.


“으아, 내가 진짜 위조범이 되는 거잖아!”


혜나는 잠시 들뜬 표정이었다가 이내 장난기를 지우고 사뭇 진지한 얼굴로 정숙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 눈빛에는 묘한 자부심이 섞여 있었다.


"언니! 이제부터 날 '브로커 박'이라고 불러"

월, 화, 수, 목, 금, 토, 일 연재
이전 18화신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