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dog-eat-dog world

#47

by 삼류작자


소에몬초(宗右衛門町), 호텔 루나 리베라 503호.


벽지 위에는 색 바랜 장미 무늬가 조잡하게 반복되어 있었고, 천장에는 크리스털 흉내를 낸 싸구려 샹들리에가 위태롭게 매달려 있었다. 커튼 틈을 비집고 들어온 네온이 방 안을 기괴한 분홍빛으로 물들였다. 과하게 넓은 침대와 머리맡 거울에 번들거리는 형광등 불빛. 그 아래로 방향제와 묵은 담배, 오래된 세제 냄새가 눅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혜나는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캔맥주를 들이켰다. 육포를 질겅질겅 씹으며 정숙의 여권을 넘기던 그녀가 툭 내뱉었다.


“완전 새삥이네.”


정숙은 침대 맞은편 의자 끝에 위태롭게 걸터앉아 있었다. 허리를 곧게 세우려 애쓰며 두 손을 무릎 위에 가지런히 올린 모습이, 마치 면접이라도 보는 사람처럼 경직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혜나가 여권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언니 말은 한국에서 납치돼서 여기까지 왔고.”


정숙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잠깐 망설이던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몇 달 동안 어떤 남자랑 살았고.”

정숙이 입을 달싹이다 간신히 대답을 뱉었다.


“…네.”

아주 작은 목소리였다.


“근데 그 납치했던 놈이 다시 나타나서 또 데려갔다가, 길에 버렸다고?”


이번엔 대답이 바로 나오지 않았다. 정숙의 시선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흐른 뒤에야 다시 아주 작게, 대답이 돌아왔다.

“…네.”

혜나는 그제야 고개를 들어 정숙을 빤히 바라봤다.


“그 와중에 같이 살던 일본 놈이 여권도 신분증도 만들어줬고?”


정숙은 가방 안쪽에서 조심스럽게 주민증을 꺼내 내밀었다. 자신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어떻게든 확인받고 싶은 간절함이 밴 손짓이었다. 혜나는 증명을 갈구하는 그 투명한 태도에 실소가 터졌다. 내밀어진 주민증은 굳이 볼 필요가 없다는 듯 혜나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애 아빠는 한국에 있단 말이지.”


정숙의 손이 본능처럼 배 위로 올라갔다. 원피스 자락 아래로 묘하게 솟아오른 배를 감싸 쥐는 그녀의 입술이 희게 질렸다.


“…네.”

목소리는 이제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혜나의 시선이 정숙의 배 쪽으로 떨어졌다. 잠깐 눈썹이 꿈틀 했지만, 혜나는 곧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캔맥주를 들이켰다.


“근데 또 그 납치한 놈이 돈을 주고 버렸다고?”


혜나가 테이블 위에 놓인 만 엔짜리 지폐들을 손끝으로 툭 건드렸다. 그다지 관심 없다는 듯 무심한 손길이었다. 정숙은 고개를 숙인 채, 쥐어짜듯 말했다.


“한국으로…… 돌아가야 해요.”


짧은 침묵이 방 안을 채웠다. 혜나는 남은 맥주를 한꺼번에 들이켰다. 도무지 앞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였다. 아니, 사실 굳이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오사카 바닥엔 말도 안 되는 일들이 발치에 차일 만큼 널려 있었고, 타인의 기구한 사연을 일일이 납득해 보려 애쓰는 건 그녀에게 사치이자 시간 낭비였다.

중요한 건 다른 거였다.

한국에 보내달라며 정숙이 내민, 저 돈.

혜나는 캔을 내려놓았다.

“오케이. 내가 한국에 보내줄게요.”




얼마 뒤 새벽.

이따금 건물 밖 어딘가에서 짐승 같은 고함이 아득하게 울려 퍼졌다. 술에 취해 악을 쓰는 사내의 목소리인지, 패거리로 몰려다니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청춘들의 객기인지 모를 소음들이었다. 소에몬초의 새벽은 그런 날 선 소리들조차 무심하게 일상의 배경음으로 흡수해 버릴 만큼 거칠어졌다.


방 안의 등은 모두 꺼졌지만, 창밖 도시의 불빛이 커튼 틈을 비집고 들어와 어슴푸레하게 실내를 밝히고 있었다. 무거운 몸을 이끌고 낯선 땅을 헤맨 피로는 정숙을 빠르게 잠의 늪으로 밀어 넣었다. 그녀의 규칙적인 숨소리가 방 안에 낮게 깔렸다.

혜나는 감고 있던 눈을 조용히 떴다. 자는 듯 눈을 감고 있었으나, 평소 해가 뜬 뒤에야 잠자리에 들던 그녀에게 밤의 적막은 도리어 한낮처럼 정신을 맑게 깨웠다. 천장에 매달린 싸구려 샹들리에를 멍하니 응시하던 그녀가 몸을 일으켜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았다.


습관처럼 담뱃갑에서 담배 한 대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러나 라이터를 집어 들던 혜나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혜나의 시선이 옆에 누운 정숙에게 머물렀다. 입에 물었던 담배를 손으로 빼냈다. 혜나는 홀린 듯 몸을 숙여 잠든 정숙의 얼굴 가까이 다가갔다. 작은 호흡마저 뺨에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그녀는 정숙의 이목구비를 하나하나 뜯어보았다. 이 바닥에는 결코 어울리지 않는, 지나치게 투명하고 고운 얼굴이었다.

이윽고 혜나의 입꼬리가 비스듬히 비틀렸다.


“존나 예쁘게도 생겼네.”


질투인지, 가련함인지 모를 빈정거리는 혼잣말이 낮게 깔렸다. 손에 쥐고 있던 담배는 끝내 불을 붙이지 못한 채 다시 담뱃갑 속으로 들어갔다. 혜나는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를 죽여 나갈 채비를 시작했다. 옷매무새를 다듬고 자신의 소지품들을 조용히 챙겼다.


준비를 마친 혜나의 발걸음이 마지막으로 화장대 앞에 멈춰 섰다. 그 위에는 어젯밤 정숙이 제 기구한 사연과 함께 늘어놓았던 여권, 그리고 방값을 치르고 남은 스무 장 남짓의 지폐가 놓여 있었다. 혜나는 잠시 그것들을 내려다보았다. 고개를 돌려 침대 위에서 무방비하게 잠든 정숙을 한 번, 화장대 위의 지폐를 한 번. 혜나는 혀를 짧게 차고는 다시 시선을 돌려 지폐를 집어 들었다. 익숙한 손놀림으로 돈을 제 백 안으로 밀어 넣었다.

방을 나서기 전, 혜나는 다시 한번 잠든 정숙을 바라보았다. 찰나의 순간, 가슴 한구석에 쓸데없는 감정 한 조각이 스쳤다. 미안함일까, 아니면 이 험한 바닥에서 남을 믿어버린 순진하고 소심한 여자를 향한 조롱일까. 하지만 고민의 유통기한은 길지 않았다. 자신에게 짜증을 내듯 신경질적으로 백을 다시 열어 챙겨 넣었던 지폐 몇 장을 꺼냈다. 3만 엔. 혜나는 그것을 화장대 위에 툭 던지듯 올려두었다. 그리고는 혜나는 짧게 숨을 내뱉으며 미련 없이 고개를 돌렸다.


“아- 나도 참.. 씨.. 이래서 이 험한 세상 살겠나.”


내뱉은 말 한마디에 남아있던 미련을 전부 털어버린 혜나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을 나섰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차갑게 울렸다.


철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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