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청이는 밤

#46

by 삼류작자


혜나는 치마 자락에 들러붙은 얼룩을 신경질적으로 툭툭 털어내며 일어났다. 아무리 문질러도 흐릿하게 남은 흔적이 못내 거슬렸지만, 더는 지체할 여유가 없었다. 여덟 시를 넘긴 아메리카무라의 저녁은 퇴근길의 인파와 밤을 향해 달려드는 불나방들이 뒤엉켜 기묘한 열기를 내뿜고 있었다. 거리 곳곳에 스피커에서는 아무로 나미에의 목소리가 습한 공기를 가르며 도시의 소음 속으로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혜나는 공원을 등지고 미도스지(御堂筋)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화려한 쇼윈도의 조명들이 혜나의 옆얼굴을 잠깐씩 훑고 지나갔다. 매연과 담배 연기, 그리고 향수 냄새가 뒤섞인 거리를 혜나는 익숙하게 가로질렀다. 망설임 없는 보폭, 명확한 목적지.


그 뒤를 정숙이 유령처럼 따르고 있었다. 두세 걸음의 간격을 둔 채, 부푼 배를 안고 위태롭게 발을 뗐다. 혜나는 진작에 뒤에서 느껴지는 기척을 알아차렸다. 아까 슬쩍 돌아봤을 때 눈에 들어온 건 임신한 몸에 어울리지 않는 낡은 가방을 든 여자였다. ‘잘못 봤겠지.’ 혜나는 기분 나쁜 소름을 털어내듯 걸음을 재촉했다.

길은 신사이바시 상점가를 지나 네온의 색이 짙어지는 히가시신사이바시(東心斎橋)로 접어들었다. 풍경은 점점 노골적으로 변해갔다. 호객꾼들의 낮은 목소리와 혼자 서서 담배를 피우는 여자들의 무심한 시선들이 이 거리에 어울리지 않는 불청객의 등장에 반응이라도 하듯 정숙의 어깨 위로 무겁게 쏟아졌다.

미츠공원에서 불과 10분 거리였지만, 이곳의 공기는 확실히 더 비릿하고 낮게 깔려 있었다. 밤의 영역, 혹은 욕망의 찌꺼기가 모이는 소에몬초(宗右衛門町)였다.


러브호텔들이 빽빽하게 들어선 골목 안쪽, 하트 모양의 간판과 반투명한 유리문이 은밀하게 빛을 내뿜는 구역에 이르러서야 혜나는 걸음을 멈췄다. 더는 느낌이 아니었다. 이 여자는 분명 자신을 목표로 삼아 따라오고 있었다. 혜나는 훽 돌아서서 정숙에게 바짝 다가와 쏘아보았다.


“오바상, 난데. 츠이테쿠노?”


유창하지 못한 일본어가 짧게 끊겨 나왔다. 정숙은 대답 없이 일본어를 하는 혜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 뜻 모를 눈동자에 질린 혜나가 짜증을 내며 다시 등을 돌렸다.


“미친년이네, 진짜.”


그때, 정숙이 다급하게 혜나의 옷깃을 붙잡았다. 기어들어 갈 듯하지만 절박함이 밴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한국으로…… 돌아가야 해요.”


혜나는 그 말에 멈춰 서서 뒤돌아봤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정숙을 다시 훑었다.


“어? ……한국 사람이야?”


가까이서 본 정숙의 행색은 묘했다. 원피스나 신발은 제법 좋은 것이었으나, 손에 든 가방은 시골 노인들이나 들 법한 낡은 여행 가방이었다. 무엇보다 화장기 없는 얼굴임에도 묘하게 예뻤다.

혜나의 머릿속에 흔한 시나리오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일본 놈이랑 살다가 배불러서 버림받은 건가.’

혜나는 차갑게 팔을 뿌리쳤다. 정숙의 손이 허공에서 맥없이 떨어졌다.


“언니.”

혜나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한국 가고 싶으면 비행기를 타든 배를 타든 알아서 해. 설마 차비 없다고 여기까지 나 따라온 거야?”


혜나는 보란 듯이 양팔을 벌려 자신의 화려하지만 고단한 행색을 과시했다.


“언니! 미안한데 딴 데 알아봐. 나 봐, 나. 나도 오늘내일하면서 겨우 살거든?”


혜나가 말을 끝내고 돌아서려는 순간, 정숙이 비명 같은 몸짓으로 다시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그리고 떨리는 손으로 가방 지퍼를 열어 구겨진 만 엔짜리 몇 장을 내밀다시피 보이며 말했다.


“도와주세요. 제발…… 한국으로 돌아가야 해요.”


“하…… 이 언니 봐라.”

혜나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그녀는 멈춰 서서 어깨에 멘 조그마한 백에서 담배 한 대를 꺼내 물었다.

치익, 라이터 불꽃이 혜나의 날카로운 눈매를 잠깐 밝혔다. 연기를 허공에 깊게 내뱉은 혜나가 정숙의 손에 쥐인 돈을 비스듬히 내려다보았다.




월, 화, 수, 목, 금, 토, 일 연재
이전 15화먹잇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