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 한 장 넘어가는 중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집중해야 하는 시간에는 그렇게도 딴짓이 하고 싶다. 그 날은 어떤 면접장이었다. 대기실에서 나의 이름이 불리길 기다리는 시간에 나는 그렇게도 딴짓을 하고 있었다. 정면에는 면접장에 입장할 수 있는 번호가 순서대로 적혀 있었고, 주변을 심사관이 서성이고 있다. 그도 지루한지 복도로 나갔다 다시 들어왔다를 반복하는데 걸음이 꼭 투덜대는 모양새와 같았다(빨리 퇴근하고 싶어 하는 것이 느껴졌다). 이러한 탓에 시선이 자꾸 창 밖으로 향했다. 예상한 질문지와 정리한 글들을 읽지 않은 채 팔을 괴고, 창 밖을 향해 멍을 때렸다. 나는 줄 곧 가을 하늘이 최고의 하늘이라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겨울 하늘도 그 못지않구나 싶었다. 당시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넓게 펼쳐져 있었고, '하늘색'이 널따랗게 펼쳐져 있었다. 꼭 수묵화나 수채화에서의 물감이 번져나가는 듯했다. 먼지나 구름 하나 없이 깨끗한 하늘을 보고 있노라면, 이 정도 추위쯤이야 감내할 수 있지 혼잣말이 나왔다. 풍경에 집중하다 보면 하나하나씩 관찰하게 되는데, 가령 지나가는 사람이라던가 나무 등이었다. 그 날엔 소나무가 있었다. '어떻게, 저렇게 푸르지' 푸른 소나무가 꽤나 자리 잡고 있었다.
우리 엄마는 셋째이고, 위로 두 언니가 있다. 그중 가장 맞이인 큰 이모는 전부터 '소나무' 노래를 좋아했다. 그래서 내가 아주 어릴 적부터 소나무는 사시사철 푸르다는 것을 노래를 통해 으레 짐작 알고 있었다. 얼마 전 큰 이모가 코로나 양성 판정을 받았다고 연락을 받았다. 안 그래도 장사가 어려운 시기에 자신의 잘못으로 가게를 열지도 못하고, 가족에게 폐를 끼친다는 생각이 이모는 한참이나 울었다고 한다. 소나무를 보니까 큰 이모가 생각나 코가 시렸다. 면접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이모에게 문자를 해본다. '이모 괜찮아? 이모 잘못 아니니까 너무 자책하지 말고 힘들지 않으면 좋겠다 -중략-' 등의 구구절절 보낸 문자에 이모는 "고마워^^"라 답했다.
우리 내 삶은 언제까지 고통이 존재하는 것일까. 나는 한 때 외로움은 친밀함의 산물이라 생각한 적이 있다. 누군가와 친밀함에서 빚어 나와, 떨어져 있을 때 느끼는 감정이 외로움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래서 친밀함이 있기에 외로움은 존재하는 것이고, 외로움이 존재하기에 친밀함이 값지다 생각하는 것 아닐까. 그렇다면 친밀함과 외로움은 종이 한 장 차이일 것이다. 내가 느끼는 외로움과 친밀함의 경계에 무엇을 두느냐에 따라 엎어라 뒤집어라 할 만큼 쉽게 넘어가는 감정. 고통과 행복도 마찬가지이지 않을까. 고통이 있기에 행복을 바라고, 행복하게 살기 위해 고통을 견디고. 우리 내 삶은 이러한 종이 한 장, 한 장을 넘어가는 책 장 같은 순간인 건 아닐까. 이모들을 보면서 이 고통을 행복하기 위해서 넘어가고 있는 중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꾹 눌렀다. 때로는 그 종이 한 장이 매우 무겁다는 걸 난 잘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