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해방촌을 다녀왔다. 북 스테이 형식의 숙소에 흥미를 붙이고, 찾아보던 와중 마음에 드는 곳을 발견해 오래전 예약해둔 날이 온 것이다. 그곳에는 최근 ‘헤어질 결심’의 감독인 박찬욱 각본집을 비롯한 박완서 산문집, 이름은 모르지만 유명해 보이는 사진 집 등이 있었다. 박완서 산문집 중 하나를 골라 앉은자리에서 읽는데, 감탄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의 필력은 실로 어마어마했다. 박완서의 소설은 학창 시절 시험에 나온 문단만 읽었을 뿐, 책으로 전혀 접하지 않았던 나의 무지함이 원망스러울 지경이었다. 왜 이 사람의 책을 난 이제껏 읽어보지 않으려 했는가. 뒤통수를 세게 맞은 느낌이었다. 우리가 자주 쓰는 뒤통수를 맞는 느낌은, 내가 알고 바라보고 있는 평범한 세상 외를 조망하게 되는 것에서 오는 경외심일 것이다. 실로 그러하였다. 경외심을 잔뜩 품고, 남편에게 말했다.
- 와. 필력이 필력이…
얼빠진 표정을 하고 있는 날 내려다보며 남편은 ‘이제야 경험했니 꼬맹아’라는 웃음으로 답하고 이렇게 말했다.
- 대단하지. 이 사람 글을 읽으면 꼭 우리가 알고 있는 글은 헌글이고, 이 사람이 쓰는 한글을 제대로 알고 싶다니까.
우리는 박완서 작가님의 (이제 그의 이름을 함부로 내뱉지 않으리, 작가님을 붙이거라) 찬양을 마치고 다시 각자의 책을 읽었다. 삶에서 누군가를 향한 경외심이 들었던 적이 있었던가. 아 있었다. 최근에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단둘이 만났는데, 그녀는 나보다 나이가 많았고 오래 보아온 사이였다. 결혼한 뒤 아이가 생기지 않았던 그녀의 이야기를 어렴풋이 전해 듣고는 이 주제에 대한 대화를 잘하지 못했다. 내가 겪어보지 않은 영역에 삐죽됨과 뚝딱 거림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차라리 침묵이 나았다고 판단했지만, 그것을 끝내 지키지 못한 일이 있었다. 아이를 가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서 임신 준비를 계획하고, 그녀에게 털어놓았다. 하지만 우리의 대화는 매끄럽지 않았고, 곧 마무리되어 다른 주제로 넘어갔다. 털어놓은 모양새가 뚝딱거린 채로 그녀를 푹푹 찔렀을 것임을, 뒤늦게 아이가 생기지 않는 오랜 시절을 보내며 알게 되었다. 임신에 대해 쉽게 대하는 나의 말이 경솔했다는 것을 그 뒤로 뼈저리게 느꼈다. 그녀의 생일이 되어 문자로 이 일에 대한 나의 뒤늦은 후회를 남기고, 만나서도 사과를 했을 정도로 나는 죄책감이 시달렸다. 그녀는 답문자로는 나에 대한 애정을 듬뿍 담아 오히려 죄책감을 갖는 날 위로하고 걱정하였다. 그 답문자는 사진 파일이 되어 자주 들여다 볼정도로 따뜻한 글들이었다. 그리고 만났을 때에는 그날의 나를 이해한다고 이야기했다. 아이가 자기 나이에 맞게 저마다 걷고, 뛰듯이 각자가 그 시기에 볼 수 있는 것과 느낄 수 있는 것이 다 다름을. 그 다름으로 인해 알지 못했던 것뿐임에 경솔했다 자책하지 말라고 이야기해주었다. 그녀의 이 이야기는 오랜 전설이 되어 내 마음속 깊이 남을 것이다. 다르기에 상대방의 태도를 이해하지 못하는 때가 많지만, 그것을 이해하는 것은 본인이 정말 넓은 사람이라는 것을 그녀는 알까. 내가 그동안 전해온 이해관계와 위로는 정말 서투른 말에 그친 것은 아닌가 반성이 될 정도였다. 그러한 그녀의 경외심으로 한주는 거뜬히 온기 가득한 사람으로 보냈다.
사실은 이러한 경외심에 대해 글을 쓸 마음이 아니었는데, 마음은 꼭 내리막길에 세워진 동전같이 저의 길을 가고 따라오라 한다. 글을 쓰고 보니 경외심을 느낄 만한 사람을 찾으세요, 그리고 경외하세요, 세상이 바뀐 기분입니다라고 말하는 것 같다. 사실이지만 이 이야기만을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다.
다시 돌아와서 박완서 작가님의 책에는 소설을 쓰게 된 이유에 대해 쓴 글이 있었다. 그녀가 겪었던 아버지와 오빠를 잃은 슬픔에 대한 이야기를 꾸역꾸역 참다가, 이제는 이야기를 할 여유가 되었을 때 아무도 들으려 하지 않았다고 느꼈단다. 그래서…
위의 문단에 나와있듯이 그녀의 어머니가 그녀에게 늘 들려준 이야기에 살을 붙여 꾸며갔고, 소설이나 자전적인 부분이 기초가 되었다고 한다. 나 또한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아 동화를 쓰노라 많이 공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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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담을 하면서, 통상적인 사회관계에서, 아주 친밀한 남편과의 관계에서 나는 여러 못난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오래도록 반복되었고, 사람이 바뀌어도 다시 또 출현하였다. 사람들이 공통으로 느끼는 영역과 다른 영역에서 괴로워하였기에, 일반적인 관계에서 누구나 어려울법한 어려움이 아니었다. 나는 아주 여러 번 이를 바라보고 다듬었다. 내가 나에게 유일하게 자부할 수 있는 성실성을 칼 삼아 연필을 깍듯, 한 번 두 번 세 번 여러 번 다듬었다. 또 다른 이야기로 흘러갈까 싶지만, 나는 그렇게 오래도록 다듬어진 사람도 존경한다. 원래는 알고리즘에 이끌려 단순한 팬심으로 좋아했던 2pm 이준호가 그중 하나인데, 지금 아주 핫하다. 하지만 그는 주목받지 못한 오랜 세월이 있었다. 다른 멤버들이 드라마나 예능을 찍을 때 홀로 숙소를 지켰으며 본인이 하고 싶은 연기에 도전을 할 때에도 묵묵히 자신의 일을 했다. 사람들은 오랜 세월이 지나 그의 계절이 왔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의 눈부신 모습을 좋아한다. 멀리서 보면 똥-그랗게 잘 빠진 동그라미와 같은 그는 사실 가까이서 보면 하나하나 다듬어진 원이었다. 그런 그의 오래도록 고집한 장인 정신이 지금의 그를 빛나게 했으리라 생각한다. 아무튼 나는 그러한 성실함이 확실하고 좋은 무기라는 것을 알기에 나의 지난 시절을 회고하고 돌아보는 시간을 자주 가졌다. 드라마틱하고 한 번에 확실한 방법이 있으면 참 좋겠지만은, 놀랍게도 반짝하고 다시 본인의 성질로 돌아가기 쉬웠다. 그래서 책도 읽고, 집단 상담에도 참여하고, 요가 수련에도 참여하며 여러 번 나를 고찰하려 노력했다. 그러면서 재밌고 때론 귀엽지만 애처롭기까지 한 여러 가지의 나를 한 데 묶어 ‘나’라고 이름 붙일 수 있게 되었다. 그러한 나를 인정하니 자연스레 애정 하게 되면서 동화는 자연스럽게 쓰게 되었다.
오늘 글에 제목을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 원래는 박완서 작가님의 ‘소설을 쓰게 된 이유’의 대목에 비추어 ‘동화를 쓰게 된 이유’를 적어보려 했고, 그것을 글을 통해 알게 됐다면 당신은 보물 찾기에 성공하였다. 짝짝짝. 두서없이 적은 글이라 마침을 맺기 부끄러운 면이 없지 않아 있지만, 이런 글을 쓰는 시간과 그 시간을 채우려는 내가 기특하기도 하다. 이렇게 하다 보면 언젠가 나도 멀리서 보면 동그라미와 같은 사람이 되었기를, 헌글이 아닌 한글을 쓰는 느낌을 맛보기를 바라며. 2022.7.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