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택근무를 하는 남편이 어쩌다 한번 회사에 나가는 날에는 혼자 시간을 보내는 몇 안 되는 날이다. 오늘 그런 날이라 모처럼 오전에 뒷 산에 올랐다. 점심시간 뒤로부터는 구름이 낀다고 했으나 오전에는 날이 좋고 맑아서 그런지 비가 올 것 같지 않은 날씨였다.
보통 아침에 잠깐 다녀오는 코스라치면, 30분 정도 걸리고 산에서 산으로 넘어가는 다리 직전에 돌아오면 된다. 그보다 조금 더 산행을 하고 싶은 날이면 산 중턱에 있는 절을 찍고 돌아오면 되는데, 돌아오는데 50분 걸린다. 오늘은 혼자이겠다 50분 코스로 산을 타고 있는데 맞은편에 내려오는 사람이 무언가가 잔뜩 들어있으나 가벼워 보이는 흰 비닐봉지를 양손에 들고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 저것이 무엇일지 궁금하였으나, 그 사람의 개인 사정이겠거니 지나치는데 그렇게 더러 흰 비닐봉지를 들고 내려오는 사람이 몇 더 있었다.
'절에서 무얼 나눠준 건가' 이렇게 생각만 하고, 절을 찍고 돌아서려는데 세 네 사람이 이삿짐을 나르는 데 쓰는 파란 박스 주위에 서있었다. 한 사람은 그 안에서 무언갈 꺼내기도 했다.
'저게 뭐지?' 가까이 가보니 야채를 무인 판매하고 있었다.
유러피안 상추라고 알려진 버터 헤드를 비롯한 샐러드용 채소들이 파란 박스에 들어 있었고. 그 옆 소쿠리에는 크기가 각기 다른 애호박과 고추도 들어있었다. 마침 집에 양상추가 똑 떨어져 새로 구매를 했어야 했는데 잘 됐다 싶었다. 게다가 버터 헤드 두 개가 천 원이라니, 다른 채소와 함께 3천 원어치 구매했다. 당시 현금을 가지고 온 것이 없어 계좌이체로 입금을 하고 내려오는데 그때서야 안 것이다.
그 흰 비닐봉지가 이 흰 비닐봉지라는 것을. '그분은 양손 가득 이걸 사신 거였구나'
원래대로 50분 코스를 마치고 흰 비닐봉지를 달랑달랑 들고 내려갔다. 맞은편 산을 올라가는 이마다, 아까의 나처럼 의아하다는 듯이 흰 비닐봉지를 힐끔 바라보더라.
'이건 표창장이야. 저기까지 올라간 사람만 볼 수 있는. 그니까 저기까지 산행을 한 사람만 누릴 수 있는 상인 거지'
혼자 생각을 하면서 내려오는데 뿌듯함과 알지 못하는 벅찬 마음이 올라왔다. 내가 재배한 것도 아닌데 우연히 만난 무인판매 채소가 이렇게나 기분이 좋을 일인가.
나는 산을 마치고 내려오면 꼭 그 앞에 있는 벤치에 앉아 양말과 운동화에 묻은 흙을 털어낸다. 다 털어내고 눈앞에는 맑고 맑은 하늘이 들어온다. 오늘 다녀온 산의 풍경도 멋졌고, 하늘도 장관이었다.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상은 주는 대상이 있어야만 받을 수 있지 않는가. 나이가 들어서 나에게 상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나여야만 한다. 누군가가 인정해주는 것이 더 소중하다고 여겼던 시절도 있었고 여전히 그러하지만, 내 인생에서 가치롭다고 칭하고 상을 줄 수 있는 사람은 반드시 나여야만 한다.
그래서 오늘 3천 원어치 야채가 든 이 흰 비닐봉지는, 혼자만의 시간을 자유롭고 건강하게 보내온 내가 나에게 주는 표창장이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