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의 덜미

by 오후세시


책을 많이 읽었다고 자부할 수는 없지만, 좋아하는 것 중에 하나는 책이라고 말할 수 있다. 재미있어서 술술 읽히는 소설책은 마치 잘 닦여진 아스팔트 도로 같아서 ‘언제 이만큼 읽었지’ 싶게 책장이 잘 넘어간다. 그래서 어려운 전공 관련 책을 읽기 전에 예열을 위해서 또는 읽고 나서 머리를 식히기 위해서 손이 잘 간다.


그런가 반면 분명 이 쪽을 읽은 것 같은데 금방 길을 다시 잃어버리는 책이 있다. 내가 방금 읽은 부분인데도 어디를 읽었는지 다시 찾아야 한다. 글의 내용보단 활자를 읽고 넘어간듯하다. 무슨 내용이었는지 기억이 안 나, 다시 앞으로 찾아가기도 한다. 이런 책을 읽을 때 메모장에 ‘이 책은 방지턱을 곳곳에 놓은 것 같다’고 메모한 적이 있었다. 낸 속력을 다시 초기화시키는 방지턱은 뭐랄까, 글이 재미없어서도 아니고 너무 지루해서도 아니다. 그냥 어렵다. 나와 먼 세계를 내 앞에서 떠드는 사람처럼 자기 계발서가 특히나 그러하다고 특정할 수 있겠다.


그런가 반면 글의 덜미가 잡히는 책이 있다. 최근에 읽은 책중에는 캐럴나인 냅의 [욕구들]이 있다. 원래 이 책이 유명하다는 것을 다음 책 [명랑한 은둔자]를 읽으면서 알게 됐다. [명랑한 은둔자]를 오랜 시간이 걸쳐 읽고 난 뒤에 도서관에서 [욕구들]을 빌렸고, 마찬가지로 반납기한 내에 읽기엔 시간이 부족했다. 결국 반정도 읽은 책을 반납했고, 다시 빌려오진 않았다. 책을 읽는 것이 꼭 오프로드를 걷는 것처럼 힘이 든다. 방지턱과는 다르다. 글이 내 덜미를 잡고 놔주지 않는다고 해야 하나. 그렇게 잡힌 몇 구절을 나누자면 이러하다.



냅은 오랜 시간 거식증을 앓았고, 자신이 굶는 욕구 아래 자리 잡은 욕구들을 풀어내어 글로 적은 것이 이 책이었다. 방대한 내용을 함축할 수는 없겠지만, 냅의 욕구는 엄마에게서 투사되어 온 불안, 부담감, 자신의 존재다운 것을 찾지 못한 혼란스러움 등으로 빚어졌다. 혼란스러움 속에서 지름길처럼 찾은 것이 ‘사회에서 이렇다고 말하는 모습’에 자신이 퍼즐 조각처럼 맞춰질 때였고, 체중이 적게 나가는 모습이었다. 그렇게 굶기의 희열을 느끼게 되면서 거식증을 투병하게 됐다.


얼마 전 이 책을 읽으면서 엄마에게 찔린 상처가 욱신거려 혼자 울다가, 엄마의 전화를 씹었다가, 다시 용서했다가 하루가 지나지 않아 엄마가 만들어준 추억의 토스트를 먹으며 행복해한다. 참 우습다.


우리 엄마는 지방에 있는 학교에 발령이 난 아빠 없이 동생과 나를 타지에서 혼자 키웠다. 밑의 층에서 쿵쿵 뛰는 소리가 시끄럽다고 매일 찾아오는 할아버지에겐 늘 죄인이었고, 하루의 일상은 어떻게 하면 값을 덜 내어 살림을 할 수 있을지 작전을 짜는 전쟁터와 같았고, 이를 들어줄 가족 하나- 친구 하나- 같은 지역에 없었으며 이 모든 것이 챗바퀴 돌듯 매번 반복이 되었다. 이해한다 엄마가 사소한 것에 칭찬받길 바라는 내 맘과 같지 않을 만큼 녹록지 않았다는 걸. 하지만 내민 작은 손은 엄마가 원하는 것이 이게 아니라 다른 것이구나까지만 깨달을 만큼 어렸다. 그렇게 나는 누군가가 만들어놓은 원형에 들어가지 않으면 ‘이게 아니라 다른 것이구나’라고 느꼈던 어릴 적 불행한 마음이 솟아나 인정받고 싶어 애를 쓴다. 내 욕구를 이해하고, 스스로 다독이기까지 먼 길이었지만 상담사가 되는 과정에서 건너지 않을 수 없는 길이었다. 다 지나온 것이지만 냅의 말처럼 골수와 양수과 되어 여전히 내 몸에 흐르는 것은 어쩔수 없나보다.


글의 덜미를 잡힌 그곳에서 나는 오늘도 엄마를 미워하고 또 다시 용서한다, 내 존재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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