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떠난신이 내려온 날 }

(이유 있는 반전,생각 없는 진실9)아스트라이아의 기다림

by 이정민 Ophelia


Thema. 아스트라이아의 별빛


가을 하늘에 별빛이 흐릅니다.

정의의 여신, 아스트라이아.


세상이 타락했을 때,

마지막까지 인간 곁을 지키다

끝내 별이 된 여신.


그녀가 들고 있던 저울은

하늘로 옮겨져 천칭이 되었고,

순백의 드레스는 밤하늘의 빛이 되었습니다.


처녀자리와 천칭자리,

그 별빛 속엔 아직도 아스트라이아의 기다림이 숨 쉬고 있다.


신화가 말하는 타락은 단순한 도덕의 추락이 아니었습니다.

진실이 거짓에 삼켜지고,

존엄이 도구로 전락하며,

연대가 끊어지는 순간..

그때 여신은 떠났습니다.


그러나 떠남은 사라짐이 아니었습니다.

별빛으로 남은 기다림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올려다보는

처녀자리와 천칭자리,

그 빛나는 별들은

아스트라이아의 발자취입니다.


언젠가 다시 내려와

황금시대를 열 것이라 믿게 한,

희망의 증거입니다.




Variation 1.

떠난 신이 내려온 날 – 쇼스타코비치와 아스트라이아


1. 레닌그라드, 1942년


포위된 레닌그라드,

굶주림 속에서 하루를 버티던 시민들(1942).



세상은 또다시 타락했고, 인간의 존엄은 흔들렸습니다.

나치 독일의 포위망 속에서 레닌그라드는 굶주림과 죽음의 도시가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하루하루, 꺼져가는 불꽃처럼 쓰러져갔고

음악가들은 악기를 잡을 힘조차 잃어가던 때.


지도 속 Leningrad(레닌그라드)는 서쪽의 Finnische Armee(핀란드군), 남쪽의 Heeresgruppe Nord(독일 북부집단군), 동쪽의 Volchov-Front(볼호프 전선)에 둘러싸여 있었다. 1941년부터 약 900일간 이어진 포위는 도시를 고립시켰고, 식량과 연료가 끊긴 채 ‘죽음의 도시’ 속에서 음악은 마지막 불꽃처럼 울려 퍼졌다.



바로 그 순간, 작곡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1906–1975)가 남긴, 교향곡 제7번 〈레닌그라드Op.60[1] 〉 는

어둠 속의 불씨가 되어 타올랐습니다.


레닌그라드의 어둠 속에서 별빛 같은 선율을 남긴,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1906–1975).




2. 연주자를 다시 모으는 기적


지휘자 카를 엘리아스베르크(Karl Eliasberg) 는

흩어진 단원들을 찾아 헤맸습니다[2].

군대, 병원, 라디오국…

심지어 죽음의 문턱에 있는 이들까지 불러내며

“우리는 끝내 연주해야 한다”는 사명을 지켜냈습니다.


처음엔 고작 15명 남짓이었지만,

그는 군 복무 중이던 음악가, 병상에 누운 연주자들까지 모아 최종적으로 약 60명 규모의 편성을 꾸려냈습니다.

원래 교향곡의 요구에 비하면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지만,

‘기적의 오케스트라‘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리허설은 고통의 연속이었습니다.

배급받은 작은 빵 조각으로 하루를 버티고,

쓰러져가는 동료를 부축하며,

다음 날 또 다른 비워져 있는 자리를 보아야 했습니다.


당국은 이에 시 당국은 단원들에게 특별 배급을 허용했습니다.

빵과 수프, 최소한의 연료.. 그것은 연습을 위한 것이 아니라

도시의 존엄을 지켜내기 위한 최후의 자원이었습니다.


그들의 연습은 단순한 음악이 아니었습니다.

존엄을 되찾는 연습이었습니다.

아스트라이아가 찾아와 저울을 다시 세우듯,

한 음과 한 쉼표로 정의의 무게를 쌓아갔습니다.




3. 1942년 8월 9일, 연주의 날


연주 당일, 소련군은 독일군의 방해를 차단하기 위해

일부러 포격 작전(Operation Squall)을 벌였습니다[3].

포성이 울리자 적군은 몸을 웅크렸고,

도시는 잠시 고요 속에서 연주를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공연장은 군인과 시민들로 가득 찼습니다.


굶주린 도시, 그러나 음악은 흐른다. 라디오는 선율을 품어 도시와 전선, 심지어 적의 귀에도 닿게 했다.



라디오는 전국과 전선으로 이 음악을 퍼뜨렸고,

심지어 독일군 진영까지 이 선율이 흘러갔습니다.


굶주린 몸, 떨리는 손끝으로도,

엘리아스베르크와 단원들은 마지막 힘을 짜내어 연주를 시작했습니다.


그 순간, 음악이 울려 퍼지자 청중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렀습니다.

“우리는 아직 살아 있다.”

이 말은 음악을 들은 시민들의 증언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들에게 쇼스타코비치의 선율은 생존의 선언이자,

존엄의 증거였습니다.


연주가 끝나자, 엘리아스베르크는 지휘봉을 내려놓을 힘조차 남지 않았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거의 쓰러지기 직전이었다’ 혹은 ‘무대에서 쓰러졌다’고 한다. 굶주린 몸으로 버텨낸 그의 마지막 힘은 곧 도시의 존엄이었다.



4. 아스트라이아가 내려온 순간


그날의 연주는 단순한 음악회가 아니었습니다.

아무도 지켜주지 않는 듯 보였던 순간,

별빛 속에 머물던 아스트라이아가

잠시 인간 세상에 내려와 저울을 다시 세운 것처럼 보였습니다.


정의는 결코 거대한 문서나 승리의 기록으로만 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굶주림 속에서도 꺼지지 않은 선율,

떨리는 손끝에서도 지켜낸 인간의 품위.

그곳에서 존엄은 다시 증명되었습니다.


어둠을 뚫고 내려온 여신, 음악은 존엄의 불꽃이 되었고

아스트라이아는 우리 곁에서 저울을 다시 세웠다.



마무리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7번은 지금도 울려 퍼집니다.

그 안에 담긴 것은 단순한 선율이 아니라,

‘떠났던 신이 다시 돌아와 인간 곁을 지킨 순간‘ 이었습니다.


아스트라이아의 별빛과 레닌그라드의 음악,

두 이야기는 시대와 공간을 넘어 하나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정의는 언제나 돌아온다.

그리고 그 순간, 음악은 곧 인간의 마지막 증언이 된다.




주석


[1] 작곡과 초연


쇼스타코비치는 1941년 여름 레닌그라드 포위 당시 작곡을 시작했으나, 가족과 함께 대피한 쿠이비셰프(현 사마라)에서 작품을 완성했다.


쿠이비셰프(현 사마라) 전경 엽서,

전쟁 속에서도 창작의 불꽃이 이어진 피난지



이후 악보는 특별 열차편으로 레닌그라드에 전달되었고,

동시에 마이크로필름으로 런던과 뉴욕에 보내졌다.

1942년 3월 5일 쿠이비셰프에서 사모수드 지휘,

볼쇼이극장 오케스트라가 초연을 맡았으며,

같은 해 6월 22일 런던에서

헨리 우드 경과 런던 필하모닉이 방송 초연을,

며칠 뒤 로열 앨버트 홀 프롬 콘서트에서 무대 초연을 했다.


런던 로열 앨버트 홀, 1942년 6월, 프롬 콘서트 무대에서 교향곡 제7번이 영국 청중에게 울려 퍼졌다.



7월 19일에는 아르투로 토스카니니가

NBC 심포니를 지휘하여 뉴욕 카네기 홀에서 미국 초연을

진행했고, 이는 방송과 음반으로도 남았다.


뉴욕 카네기 홀

대서양을 건너온 교향곡 제7번,

뉴욕 카네기 홀에서 세계의 심장으로 퍼져 나갔다.

전쟁을 넘어 인간의 존엄을 증언한 무대.



[2] 기적의 오케스트라와 편성의 특별함


카를 엘리아스베르크는

당시 레닌그라드 라디오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였다.

그는 군대·병원·거리에서 단원들을 수소문해

총 60명가량을 모아 ‘기적의 오케스트라‘ 를 세웠다.

이는 산산이 흩어진 사람들을 다시 모아

하나의 오케스트라로 꾸린 사건이었다.


이 기본 편성을 토대로, 교향곡 제7번은 전례 없는 금관의 확장으로 ‘도시 전체가 저항하는 듯한’ 사운드를 구현했다.



특히 교향곡 제7번은 약 75분이 소요되는

대규모 작품으로,

100명 이상의 편성이 필요했다.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중 드물게

알토 플루트가 포함되었고,

무대 밖(outside stage)에서

추가 금관 파트가 울려 퍼지도록 배치되었다.

일반적인 교향곡 금관 편성이

호른 4~6, 트럼펫 2~3, 트롬본 3, 튜바 1 정도라면,

이 작품에서는 호른 8, 트럼펫 6, 트롬본 6이라는

압도적 규모였다.

그 결과 청중은 무대와 홀 전체에서 겹겹이 쏟아지는

금관의 울림을 경험했으며,

이는 ‘도시 전체가 저항의 소리를 내는 듯한‘ 효과를 만들었다.




[3] 1942년 8월 9일의 연주와 심리전


현재의 상트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니 대홀 내부.

1942년 8월 9일, 포위 속에서도 연주가 이어진 ‘기적의 무대’는 라디오와 확성기를 타고 전 세계에 저항의 울림을 전했다.



1942년 8월 9일,

레닌그라드 필하모니 대홀에서의 연주를 방해하지 못하도록 소련군은 독일군을 향해 의도적인 포격 작전을 펼쳤다.

연주는 라디오로 생중계되었고,

확성기를 통해 나치 진영에도 들려갔다고 전해진다.

뉴욕 타임즈 평론가‘올린 다우네스(Olin Downes)‘ 는

이 곡을 두고 ‘단순한 음악이 아니라,

인류 전체의 존엄을 위한 선언‘ 이라고 평했다.




[4] 소방대원 쇼스타코비치와 타임지 표지


1942년 7월, 《타임》지가 표지에 실은

방화복 차림의 쇼스타코비치.

예술가의 손이 곧 레닌그라드의 방패였다.



쇼스타코비치는 레닌그라드 포위 상황에서도

민방위대에 자원 입대했으나 시력 문제로 두 번 낙방했다.

이후 소방대 임무를 맡아 콘서바토리 건물을 지켰으며,

방화복을 입은 그의 모습은 1942년 7월 《타임》지

표지에 실리며 ‘레닌그라드를 지키는 예술가’의 상징으로

전 세계에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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