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ariation 5. 술의 신과 피아니스트의 기도

《이유 있는 반전, 생각 없는 진실》 별책부록

by 이정민 Ophelia


예술가의 술잔, 두 시대의 반전 - 하이든에서 리스트까지


세상의 모든 음악은 결국 하나의 질문으로 되돌아갑니다.

“인간은 왜 음악을 하는가.”


프란츠 리스트, 젊은 시절의 초상 (1840년대경)

그의 눈빛엔 음악보다 깊은 신념이 머물러 있었다.

명성과 신앙, 예술과 인간 사이의 균형을

늘 음악으로 답하던 사람.



이번 바레이션 5의 주인공은 리스트예요.

왜 그일까요?


하이든이 ‘음악이 생업이던 시대‘ 의 대표였다면,

리스트는 ‘음악이 기도가 되던 시대‘ 의 얼굴이었어요.


하이든의 잔은 궁정의 계약서 위에 놓인 한 잔이었죠.

삶을 버티게 하는 알코올,

물의 대체물이자 하루의 대가로 주어진 위로.


그러나 한 세기가 흐르자,

예술가의 잔은 조금 달라졌습니다.


왼) 피아노 앞의 리스트 - 고독한 기도의 순간.

오) 파리 살롱의 리스트 - 예술이 시대의 언어가 되던 밤.



리스트의 시대에 샴페인은 ‘성공’과 ‘영감’을 축하하는 상징이 되었고, 그의 술잔은 삶을 찬미하는 예술가의 제스처가 되었어요.


두 사람의 잔은 백 년의 시간을 사이에 두고 서로를 마주 봅니다.

하이든의 잔은 버티기 위한 것이었고,

리스트의 잔은 살아 있음을 건배하기 위한 것이었죠.


이 바레이션은,

그 반전에서 시작됩니다.



피아노의 왕, 그러나 고독한 인간


프란츠 리스트는 1811년, 당시 헝가리 왕국의 도보르얀(지금의 오스트리아 라이딩)에서 태어났어요.


아담 리스트(Adam Liszt, 프란츠 리스트의 아버지)

하이든의 곁에서 일하며 궁정 악단의 회계업무와 연주를 맡았던 인물.



그의 아버지 아담 리스트는

에스테르하지 궁정의 관리이자 아마추어 첼리스트로,

궁정 악단의 회계와 기록 업무를 맡으며

하이든의 곁에서 일하던 사람이었죠.

그래서 어린 리스트의 집 안에는

늘 악보와 음악이 함께 있었고,

하이든의 교향곡은 그가 세상을 배우는 첫 언어가 되었어요.


“Je me sens profondément Hongrois.”

: 나는 깊이 헝가리인이라 느낀다.


“Je suis Hongrois de cœur et d’âme.”

: 나는 마음과 영혼으로 헝가리인이다.


리스트는 스스로를 ‘마음과 영혼으로 헝가리인’이라

불렀습니다.

지금의 라이딩은 오스트리아 땅이지만,

1811년 그가 태어났을 땐 헝가리 왕국의 작은 마을이었고,

그의 음악 속에는 늘 국경을 넘어선

한 민족의 선율이 흐르고 있었어요.


9살에 무대에 올라 ‘신동 피아니스트’ 로 주목받았던 리스트는 곧 헝가리 귀족들의 후원으로 비엔나로 유학을 떠났어요.

그곳에서 체르니(Carl Czerny) 에게 피아노를,

살리에리(Antonio Salieri)에게 작곡을 배웠죠.


체르니는 바로 베토벤의 제자로,

엄격하고 논리적인 해석으로 유명했어요.

살리에리는 모차르트의 동시대 작곡가로,

그 시대 빈 음악계의 최고 권위를 지닌 인물이었죠.

리스트가 비엔나에 도착했을 당시,

살리에리는 이미 60대 후반의 노인이었지만

여전히 왕립음악원에서 작곡을 가르치고 있었어요.

이 어린 소년은 바로 그 거장들의 마지막 세대였던 셈이에요.


그리고, 전설처럼 전해 내려오는 한 장면이 있습니다.


비엔나의 어느 연주회 날..

리스트가 11살 무렵 무대에 올랐을 때,

베토벤(Beethoven) 이 직접 무대 뒤로 들어와

그의 연주를 들은 뒤, 이마에 입맞춤을 했다는 이야기.


11살의 프란츠 리스트

- 베토벤 앞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던 소년.


He kissed the boy’s forehead and said,

“You are the one

who shall continue what I have begun.”

( 그는 소년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내가 시작한 것을 이어갈 이는 바로 너다.” )


이 이야기는,

‘베토벤의 축복의 키스’(Beethoven’s Kiss of Blessing) 라 불리며 후대 전기 작가들에 의해 널리 전해졌어요.


대표 기록으로는,

• Lina Ramann, Franz Liszt: Artist and Man (1880s)

• Carl Czerny의 제자들이 남긴 구술 회고록 등이 있어요.


다만, 그 시기 베토벤은 이미 청력을 거의 잃은 상태였고,

공식 연주회에 참석했다는 기록도 없기 때문에

역사학자들은 이 사건을 상징적인 전승으로 봅니다.


하지만 진실 여부를 넘어,

이 이야기가 주는 상징은 여전히 빛나요.

하이든의 제자였던 베토벤,

베토벤의 정신을 이어받은 리스트..

세대를 이어 흐른 그 음악의 맥박 속에서

‘축복의 키스’는 전설보다 더 깊은 예술의 유산이 되었으니까요.




음악가의 술잔, 명예의 대가


리스트가 청년이 되었을 땐,

이미 유럽 전역이 그의 이름으로 들끓었어요.

‘리스트 피버(Lisztomania)’라는 말이 생길 정도였죠.

그의 연주는 평범한 음악회라기보다 하나의 ‘사건’이었어요..

청중이 환호하며 손수건을 던지고,

여인들이 그의 머리카락 한 올을 기념품으로 간직했을 정도였으니까요.


왼) ‘리스트피버(Lisztomania)’ 풍자화

- 유럽을 뒤흔든 열광의 무대.

오) 19세기 대공연장의 리스트 - 광란이 예술로 승화된 순간.


이 단어 ‘Lisztomania’ 는

독일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Heinrich Heine) 가

1844년 파리 음악계 리뷰에서 처음 사용했어요.

그는 이렇게 썼죠.


“Was ist aber der Grund dieser Erscheinung?

Die Lösung der Frage gehört vielleicht eher in die Pathologie als in die Ästhetik.”

“이 현상의 원인은 무엇인가?

아마 해답은 미학보다는 병리학의 영역에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공연장은 이렇게 묘사했어요.


“The applause which greeted him …

a delirium unparalleled in the annals of furor!”

“그에게 쏟아진 환호는… 광란의 역사에서 전례 없는 열광이었다!”


그의 음악은 기교를 넘어 ‘초월’ 그 자체였죠.

그래서 사람들은 리스트를

‘초절의 피아니스트 (transcendental pianist)’라 불렀어요.

이 단어 transcendental은 단순한 ‘탁월함’을 넘어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다’는 뜻을 품고 있었죠.

그의 대표작 《Transcendental Études (초절기교 연습곡)》처럼요.


리스트의 《Études d’exécution transcendante》

초절기교 연습곡 초판 악보

: 인간의 손끝이 닿을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선

열두 개의 기도문처럼 쓰인 음악.




예술가의 샴페인 – 그가 건배한 이름들


그 무렵 리스트의 술잔에는 와인이 아닌 샴페인이 따라졌다고들 해요. 하지만 그의 마음속 잔에는 언제나 고향의 붉은 와인이 남아 있었죠.

헝가리의 세체니 메를로 - 그가 황제에게 바친 바로 그 와인처럼, 명예와 헌신의 색은 여전히 붉었어요.


리스트가 황제에게 헌정한 와인의 도시,

세체니(Szekszárd).

예술가의 입술에 닿은 건 술이 아니라, 시대의 열기였다.



파리, 바이마르, 런던의 연회장마다 늘 리스트가 있었고

그의 곁에는 시대의 예술가와 사상가들이 모여들었어요.


예술과 철학, 문학이 피어나는 19세기 살롱.

그곳에서 리스트는 음악으로 대화를 이끌었다.

건반 위의 빛처럼.



쇼팽(Chopin), 조르주 상드(George Sand),

하인리히 하이네(Heine), 알퐁스 드 라마르틴(Lamartine),

그리고 훗날 그의 제자가 되는 한스 폰 뷜로(Hans von Bülow) … 그는 음악과 문학, 철학이 어우러진 19세기 살롱의 심장부에 있었지요.


한 전기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습니다.


“At one banquet in 1846 …

the fatal cup set such tides of champagne flowing

that all Liszt’s eloquence was shipwrecked in it.”

- Hector Berlioz, as quoted in Huneker,

Franz Liszt (1911)


1846년의 어느 연회에서,

치명적인 한 잔이 넘쳐흘러

리스트의 웅변까지 샴페인에 잠기고 말았다는 이야기예요.


그날의 샴페인은 음악가의 목소리보다 더 큰 파문으로,

연회의 주인공이 누구였는지를 끝내 증명해버렸죠.


그의 삶은 늘 음악과 술, 명예와 피로 사이에서 흔들렸어요.

술잔은 찬란했지만, 그 내면에는 언제나

‘예술가로 산다는 것’의 고독이 층층이 가라앉아 있었죠.


그 고독은 결국 노래가 되었습니다.

그의 음악은 술처럼 짙어지고, 기도처럼 맑아졌어요.




리스트의 마스터클래스, 웃음이 흐르는 피아노


리스트가 무대 위에서 혼신의 정열을 쏟아낸 음악의 기록들을 제자들과 나누는 시간 동안은 늘 이야기와 웃음이 흘렀다 해요.


빠른 손놀림으로 악보 다섯 줄을 한눈에 읽으며 연주하다가,

페이지 넘김이 늦으면 손을 뻗어 직접 악보를 낚아채 넘기곤 했어요.

“He played with such speed and humor that even his mistakes sounded charming.”

“그의 연주는 너무 빠르고 유머러스해서, 실수조차 매력적으로 들렸다.”


그리고 이렇게 농담을 던지곤 했죠.

“자, 여긴 베토벤이 와서 꾸중할 대목이야!”


이에 제자들은 웃음을 터뜨렸고,


손끝의 기술보다

마음의 테크닉을 열어 주었던 스승으로..


화려한 기교보다 먼저 감정을 마주하는 법을 얘기하는 선배로 그의 살롱은 즐거움과 기대가 오가는 배움의 공간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외로운 음악의 공간이 모두의 위로로 바뀌어 가는 시간을 제자들은 기억했어요.


그중 한 사람, 에이미 페이(Amy Fay) 는 1870년대 바이마르에서 그를 직접 사사하며 그 순간을 편지 속에 이렇게 회상했어요.


“Liszt does not teach by rules; he teaches by inspiration, by metaphor, by the fire of his own imagination.”

( 리스트는 규칙으로 가르치지 않는다.

그는 영감으로,

비유로,

자신의 상상력의 불꽃으로 가르친다.)


페이는 그의 수업은

‘기술보다 정신을 깨우는 시간’이었다고 전하며,

리스트는 ‘표현의 자유’가 자신에게 닿을 수 있을 거라는 믿음 (악보에 적힌 음표보다 그 안에 숨은 마음을 꺼내는 법)을 강조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틀린 음보다,

의미 없이 흐르는 음을 더 두려워하라고 일렀죠…


늘 두 대의 피아노에서

리스트가 연주를 시작하면,

음표에 감정을 털어내듯이 싣고,

연주를 통해 연주자 내면의 감정과

듣는 이의 마음이 함께 완성되어 갔습니다.

제자와 대화하듯 이어지는 그 순간은,

마치 즉흥적인 이중주, 예술의 대화처럼요.


리스트가 즐겨 사용하던 피아노는

Érard 와 Pleyel 이었습니다.

Érard는 밝고 명료한 음색으로 대규모 홀에 어울렸고,

Pleyel은 따뜻하고 시적인 소리로,

제자들과 ‘대화하는 음악’을 나눌 때 자주 쓰였죠.


이 두 악기는 19세기 유럽의 피아노계를 이끌던 쌍두마차였으며, 그의 친구 쇼팽 역시 Pleyel을 사랑했습니다.


리스트가 사랑한 Érard

- 황금빛 음색으로 웃음이 흐르던 살롱의 오후.

(Érard grand piano, ca. 1867,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Open Access, Public Domain)



사랑과 상실, 그리고 고독의 건반


Marie d’Agoult (1805–1876)

프랑스의 귀족이자 작가 다니엘 스테른(Daniel Stern)으로 활동한 인물. 리스트의 연인이자 세 아이의 어머니로,

그의 젊은 시절 예술적 영감을 함께한 여인.



그의 곁엔 마리 다구 백작부인이 있었어요.

프랑스의 귀족 부인으로,

당대 작가 조르주 상드의 친구이기도 했죠.

유부녀였지만, 리스트와의 만남은 운명처럼 시작됐어요.

두 사람은 1833년경 파리에서 처음 만나,

곧 세상을 등지고 함께 스위스와 이탈리아로 떠났어요.


1835년부터 약 10년 남짓,

그들은 유럽을 여행하며 예술적 동반자이자 연인으로 지냈죠. 이 시기 리스트는 ‘순례의 해(Années de pèlerinage)’ 같은 명곡을 작곡했고, 마리는 다니엘 스테른(Daniel Stern) 이라는 필명의 작가로 활동했어요.


그 사이에 세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Marie d’Agoult and young Cosima Liszt

1830년대 초, 리스트와 마리의 사랑이 한창이던 시절의 초상. 어린 코지마는 훗날 리하르트 바그너의 아내이자 ‘바이로이트의 여인’으로 성장하게 된다.



첫째 블랑딘(Blandine Liszt, 1835–1862),

둘째 다니엘(Daniel Liszt, 1839–1859),

그리고 막내 코지마(Cosima Liszt, 1837 ~ 1930)는

훗날 리하르트 바그너의 아내가 되는 인물이죠.


그러나 마리와의 사랑은 오래가지 못했어요.

1844년, 두 사람은 결국 헤어졌고,

아이들은 리스트의 어머니 안나 라게데르(Anna Lagerder Liszt) 의 손에 맡겨졌어요.

첫째 블랑딘은 어려서부터 병약해

스물일곱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고(폐결핵으로 추정),

막내 다니엘은 젊은 나이에 병으로 생을 마감했어요.


리스트의 인생에는 화려함보다 잃음이 더 깊게 남았어요.

그의 음악 속 슬픔은 이 시기의 침묵과 고독에서 자라났을지도 몰라요.




아버지의 술잔, 딸의 운명


그의 인생에서 가장 큰 상처는,

젊은 시절의 사랑보다는 딸 코지마였던 것 같아요.


코지마는 리스트의 제자이자 ‘음악적 아들’로 불리던

한스 폰 뷜로 (Hans von Bülow, 1830 ~ 1894)와 결혼했지만, 그의 스승이자 리스트가 가장 아꼈던 인물, 리하르트 바그너 (Richard Wagner, 1813 ~ 1883) 에게 마음을 빼앗겼죠.


코지마보다 24살 연상이었던 바그너는,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작곡하던 시기였어요.

그 음악처럼 위험하고도 열정적인 사랑이 현실이 되어버린 셈이었죠.


1865년, 두 사람 사이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이름은 이졸데 ( Isolde Wagner, 1865 ~ 1919 ),

그들의 사랑을 상징하는 이름이었어요.


리스트는 그 소식을 듣고 한동안 말을 잃었어요.

그는 일기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My daughter has chosen a path that tears my heart apart. But may God forgive her, as I must try to do.”

… “나의 딸은 내 마음을 찢는 길을 택했다.

그러나 신이 그녀를 용서하길… 나도 그래야 하니까.”


세월이 흘러..

코지마가 결국 바그너와 결혼했을 때,

리스트는 조용히 바이로이트 축제극장(Bayreuth Festspielhaus) 개관식에 나타나 이렇게 말했다고 해요.


“그녀가 자신의 운명을 따르게 두자.

어쨌든 내 딸이니까.”


그는 그날, 술잔 대신 성배(holy chalice)를 든 사람처럼

운명과 용서를 함께 삼켰습니다.

그의 술잔은 이제 고통이 아닌,

용서의 잔이 되어 있었어요.


코지마는 이후 바그너의 음악과 유산을 이어받아

‘바이로이트의 여인’으로 불렸죠.

남편이 꿈꾸던 총체예술 ( Gesamtkunstwerk )

음악, 문학, 연극, 미술이 하나로 어우러진 그 이상을

그녀는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에서 현실로 완성한 여인이었어요.


그녀의 이름 Cosima 는 cosmos, ‘질서와 조화’ 에서

비롯된 말이에요.

아버지의 혼란과 고통 속에서도,

그녀는 끝내 자신만의 조화를 완성한 셈이었어요.

바그너가 남긴 혼돈의 예술을 질서로 다듬고,

리스트가 품었던 신앙의 고통을

음악의 언어로 화해시킨 그녀는

결국 두 세계를 하나로 잇는 ‘조화의 사람’이 되었지요.


그리고 훗날 바그너가 세상을 떠났을 때,

리스트는 병약한 몸으로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집니다.


“Now I must pray for both of them..

for the man who stole my daughter,

and for the daughter I lost.”

(이제 나는 둘 모두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내 딸을 데려간 남자와, 내가 잃은 딸을 위해.)


노년의 코지마 리스트(Cosima Liszt, later years)

세월이 흘러도 단정하고 고요한 눈빛.

아버지의 음악과 남편의 이상을 품은 채,

예술과 신념 사이에서 자신의 길을 끝까지 걸어간 여인.



리스트는 세상을 떠나기 전,

그녀의 사진을 손에 쥔 채 기도하곤 했다고 전해집니다.


마치 술잔 대신 성배 ( holy chalice) 를 든 사람처럼,

운명과 용서를 함께 삼켰습니다.

그의 술잔은 이제 고통이 아닌,

용서와 화해의 잔이 되어 있었지요.




마지막 건반 위의 기도


리스트, 1860년대 – 사제의 옷을 입은 피아니스트

세속의 무대에서 물러나, 피아노를 제단 삼아 기도하던 시절.


세월이 흘러 그 초절한 손끝이 쇠약해질 무렵에도,

리스트는 피아노 앞을 떠나지 않았어요.


그의 제자였던 실로티(Alexander Siloti, 1863 ~ 1945),

사우어(Emil von Sauer, 1862 ~ 1942),

프리들라이너(Arthur Friedheim, 1859 ~ 1932) 등은

“마지막까지도 리스트는 매일 건반 앞에 앉았다”고 회고했죠.


다만, “그의 연주는 거의 속삭임처럼 작았고

그의 손끝에서 울려 나오는 것은 더 이상 음이 아니라 기도 같았다“ 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He touched the piano like a relic…

the notes were prayers rather than music.”

- Alexander Siloti


그의 마지막 곡들,

〈Nuages gris (잿빛 구름, 1881)〉,

〈La lugubre gondola (비통의 곤돌라, 1882 ~ 83)〉,

〈Via Crucis (십자가의 길, 1878 ~ 79)〉,

젊은 시절의 불꽃 대신,

고요한 신앙과 깊은 회한이 남은 음악들이었어요.


그의 삶이 화려한 바레이션처럼 흘렀다면,

마지막은 숨을 고르듯, 소리 내지 않는 침묵..

하나의 Rest(쉼표) 였죠.


그 고요 속에는 세상의 모든 고통을 품은

‘건반의 기도’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또한, 그는 음악을 신성한 포도주라 불렀어요.


“Music is the divine wine.”

- Franz Liszt (letter from Rome, 1856)


Du berceau jusqu’au ciel (요람에서 천국까지),

1887년 헌정 삽화

천사들의 합창과 기도의 여인 사이에 놓인 ‘리라’,

음악이 인간과 신을 잇는 유일한 다리임을 상징합니다.

리스트의 생애와 음악을 그려 헌정한 상징적 작품으로,

“Music is the divine wine.”이라는 그의 신념을 시적으로 새긴 그림이기도 합니다.



음악은 인간이 신에게 닿을 수 있는 가장 순결한 통로라고 믿었지요.


젊음엔 사랑을 위해,

중년엔 명예를 위해,

노년엔 신을 위해 살았던 사람.


그가 남긴 마지막 잔에는,

잃은 딸의 이름이 …

가장 조용한 기도로 떠올랐을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