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네게 말을 건 이 시간을 사랑해 》

빗속에서 피어난 기억하나 2. 소소한 음악의 기쁨(비창과 가보시 샌들)

by 이정민 Ophelia

시처럼,


비가 내렸다.

말없이, 그러나 확실하게.

기억이라는 창을 두드리며

그날의 음악을 불러냈다.


어른 슬리퍼 위의 내 발끝,

작았던 나, 더 작은 내 손가락.

그러나 세상의 소리를 다 품고 싶었던

간절함.


세상은 작고,

음악은 너무 커서

나는 그 안에 조용히 숨었다.



산문처럼, 이야기


‘엘리제를 위하여’로 베토벤을 처음 알았지만,

그의 ‘비창‘ 8번은

내가 처음으로 마주한 베토벤의 소나타였다.

단순히 연주했던 곡이 아니라,

나를 조용히 바라보던

그리고 내가 처음으로 내보인

마음의 조각이었다.


그 시절, 피아노 앞에 앉았지만

페달은 발에 닿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어른의 ‘가보시 샌들’을 신었다.

어린 마음에도

페달을 밟고 싶은 마음은

그 무엇보다 진지했다.


그 신발을 신고

나는 오른쪽 페달을 밟았고,

페달이 만들어내는 잔향과 떨림을

귀로, 그리고 가슴으로 들었다.


매우 어렸던 나는, 라디오에서 들려오던

오케스트라의 웅장함이

모두 피아노에서 나오는 소리라고 믿었다.

어떻게 현악기와 관악기의 소리를

내 손으로 만들어낼 수 있지?

그건 마법 같았다.


그래서 나는 새벽마다

왼쪽 페달을 밟아보고

가운데 페달을 눌러보며

소리 하나하나에 귀를 바짝 세웠다.


그건 연습이 아니라,

답답했던 마음이 만들어낸

탐색이었고, 기도였고, 꿈이었다.



마무리 시처럼


그때의 내가,

지금의 나에게 말을 건다.


“수고했어.

어른의 가보시 슬리퍼를 신고

소리를 찾아 헤매던 새벽의 시간들.

그 간절했던 마음과

속삭이듯 쌓아 올린 시간들은

이미 충분히 세상에 닿아 있었어.”


비가 오는 날이면

나는 그 샌들을 떠올린다.

나의 오래된 친구 ‘비창’과 함께

조용히, 빗속의 위로를 품은 채

다시 피아노 앞에 앉는다.


그때처럼..

말없이, 그러나 확실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