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vember Suite 1 - 문과 빛의 계절》
• 시간의 기억 - 숫자 속에 남은 계절의 그림자
로마의 달력에서 November는 해의 아홉째 달이었습니다.
라틴어 novem이 ‘아홉’을 뜻하기 때문이죠.
마치…
악보는 같은데
조옮김(Transposition)이 이루어진 것처럼요.
빛과 그림자가 섞이는 문턱에서.
계절은
여름의 생명에서 가을의 여유로,
수확이 끝나고 겨울을 맞이하기 전의
‘기다림의 틈’으로 옮겨갑니다.
기다림의 계절,
빛과 어둠의 순환이라는 리듬.
이 틈 속에서 우리는 지난 계절의 빛을 돌아볼게요.
어둠이 먼저이고,
빛은 그 뒤를 따른다고
옛사람들은 믿었어요.
“어둠이 온다면, 빛은 어디에 숨어 있을까?”
• 11월의 옛이야기 세 송이
달력 속 숫자들만큼이나
유구한 시간을 흘러온 얘기들이 있어요.
촛불이 어울리는 밤,
빛을 잃지 않기 위해
작은 불을 지켜내던 이들의 이야기.
겨울이 오기 전,
그들은 불을 지키고,
달을 바라보고,
여우 꼬리에 깃든 불빛을 따라 길을 찾았습니다.
그 이야기들을..
늘 조금씩 밀려 이제야 닿는
시간의 옛 그림자처럼 만나볼까요?
겨울이 오기 전,
세상에 빛을 부탁했던 세 가지 이야기.
북쪽의 바람,
서쪽의 달,
동쪽의 여우불을 따라
천천히 걸어가 볼게요.
오늘, 첫 불을 켭니다.
• 사우윈(Samhain) - 빛과 어둠이 교차하는 문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의 Calton Hill에서는
매해 10월 31일 밤,
Samhainn Fire Festival이 열립니다.
고대 켈트인이 믿었던
“빛과 어둠이 교차하는 문”을 기리는 축제이지요.
불꽃과 횃불이 밤을 가르고,
사슴뿔 머리장식과 행렬은
옛 의례를 오늘의 언어로 다시 살아내는 순간입니다.
켈트인은 어둠에서 빛이 태어난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하루는 밤에서 시작했고,
한 해는 겨울에서 시작된다고 여겼지요.
해가 지는 순간,
새날이 열린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10월 31일 태양이 저무는 그 순간,
이미 11월 1일의 전야(Eve)가 시작되었고…
사람들은 그 밤을
사우윈(Samhain)의 밤이라 불렀습니다.
한 해의 끝과 시작이 겹치는 문,
산 자와 조상들의 거리가 가까워지는 시간.
세계가 잠시 숨을 고르는 틈.
후에 교회는 이 전통을 품어
11월 1일을
모든 성인의 날(All Hallows’ Day)로 정했고,
그 전날 밤 All Hallows’ Eve가
오늘의 Halloween이 되었어요.
우리는
10월의 마지막 밤을 축제로 즐기지만,
그 뿌리는
11월 첫새벽,
작은 불빛을 지키던 이들의 새해로 남아
지금도
아무 말 없이 빛을 나눕니다.
빛이 꺼질까 두려울 때,
옛사람들은 촛불을 밝혔고
기억을 불러냈으며
사랑하는 이름을 마음으로 읊조렸어요.
• 바람의 신과 호수의 거울 - 북유럽의 11월
옛 노르웨이에서는 11월을
“바람이 거울을 깨뜨리는 달”이라 불렀대요.
겨울의 신 스카디 곁에는
눈 속의 늑대가 용기를 지키고,
어둠 위의 부엉이가 사유의 빛을 지켰다.
바람의 신 스카디는 산에서 노닐다가,
11월이 되면 호수로 내려와
수면의 거울을 살며시 흔들었어요.
차가운 바람이 물결을 건드릴 때마다
달빛은 은빛 파편처럼 흩어졌지요.
사람들은 조용히 말했습니다.
“아, 겨울이 왔다.”
그래서 첫 얼음 위를 걸을 때면
속삭였어요.
“깨진 거울 속에도 달은 여전히 있다.”
빛은 지는 것이 아니라
모양을 바꾸어 곁으로 돌아오는 법.
차가움 속에서도
빛을 고요히 품어내는 계절.
• 동쪽 - 여우가 불을 들고 지나간 밤
(일본 아즈마 지방의 이야기)
옛날, 산 속의 여우가 매년 11월이면
자신의 꼬리에 불을 붙여 마을을 밝혔대요.
그 불빛이 단풍이 되었고,
불이 꺼지면 겨울이 시작되었다고 하지요.
그래서 일본에서는 지금도
11월 단풍을
여우불 ( 狐火,きつねび, kitsunebi)이라 부릅니다.
“단풍은 나뭇잎이 타는 게 아니라,
여우가 불을 들고 지나간 흔적이다.”
좌: 츠키오카 요시토시〈여우불〉(1880s)
우: 19세기 일본 우키요에 작가의 여우불 장면
서로 다른 화가의 붓끝에서 태어난,
같은 전설의 두 개의 불빛.
그 불이 스러져도
자리는 아직 따뜻했어요.
우리는 오래된 이야기에서
잊지 말아야 할 빛줄기를 주워 들죠.
어떤 해의 해질녘은
축제보다 조용한 촛불이 어울려요.
11월, 기다림의 달.
빛이 돌아오는 리듬 속으로
천천히 들어섭니다.
옛사람들은 어둠 속에서
누군가의 귀환을 그리며 기다렸어요.
모든 불빛에선 기다림이 태어났어요.
‘다시 되돌아올 따뜻한 생명’.
두렵지만, 여우꼬리의 불빛을 바라보며..
달의 거울은 오래된 연인의 숨결을 담아 내며..
바람의 노래는 떠난 이를 부르는 듯 흘려 보내며..
“옛날, 어느 산속 마을에서는
11월 밤이면 여우가 꼬리에 불빛을 달고 지나간다고 했다.
그 빛은 단풍도, 별빛도 아닌
기다림의 징표처럼 산을 타고 흘렀다.”
어둠이 길어지던 계절,
사람들은 아주 작은 불 하나를 지켰습니다.
사라질까 두려워 켜둔 불이,
천년을 지나 우리 밤에 남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