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소소한 음악의 기쁨 / 음악으로 쓰는 설화의 숨결 ii
*무지개가 뜨는 자리*
누군가 말했어요.
“용이 지나간 자리엔 무지개가 뜬다”고.
그 말을 처음 들었던 날, 문득 떠올랐어요.
한 무대의 끝,
객석 한켠에서 조용히 눈시울을 훔치시던 어르신.
제 연주가 끝나고,
그분은 다가와 조용히 말씀하셨어요.
“오늘… 제 마음에 무지개가 떴어요.”
그 짧은 한마디가,
어쩌면 제가 음악을 계속 이어가는 이유이기도 했어요.
1. 전설이 살아 숨 쉬는 산, 계룡산
계룡산은 닭(鷄)의 볏처럼 솟은 봉우리와
용(龍)의 등줄기 같은 능선을 지닌 산이에요.
무속과 불교, 도교가 공존하는 신령한 산.
그 안에는 아직 날지 못한 용이 산다는 전설이 전해지네요.
도를 닦아 용이 되려던 암탉이
승천 직전 기쁨에 “꼬끼요~”를 외치는 바람에
완전한 용이 되지 못하고,
닭과 용 사이 어딘가,
그 중간쯤 존재로 남게 되었다는 이야기.
그 이야기를 읽으며,
제 모습이 오버랩…
2. 닭과 용 사이, 내 위치인 듯…
계룡산의 용처럼
저의 날개짓은 매번 어색하고 불안해요.
“왜… 어떻게… 어떤 문제일까…”
스스로에게 묻고 또 고민하는 날들.
완벽이라는 것이 있다면
한 번쯤은 그렇게 연주해 보고 싶고,
더 나아지고 싶은 마음이 커지는데
늘 어딘가 미묘하게 도달하지 못한 채
돌아서야 하는 연습실의 하루하루들…
하지만 그 불완전한 날갯짓조차,
사실은 연습 중인 용의 비상처럼
아름다울 수 있다는 걸
조금씩은 인정하게 되었던 날이 있었어요.
“Could I stop my hand from shaking?”
- 내 손의 떨림을 멈출 수 있을까요?
“Has there ever been a moment with so much to live for?”
- 이렇게까지 간절히 살아낸 순간이 또 있었을까요?
3. Afternoon Tea 시간의 관객들
영국 유학 시절,
런던의 작은 예배당에서 연주했던 Afternoon Tea 음악회.
관객은 대부분 노부부들이었어요.
손을 맞잡고, 말없이 음악을 기다리는 그 모습.
그 장면은 저에겐
예술을 존중하는 가장 따뜻한 형식의 인사처럼 다가왔죠.
저희처럼 공부하는 젊은 예술가들에게
정중한 침묵과 온기로 환영을 전하는 것.
그건 (제가 느낀)
영국만의 섬세한 예의와 배려였어요.
4. “베토벤 곡, 너무 감동적이었어요”
연주를 마친 뒤,
한 쌍의 노부부가 다가와
제 손을 꼭 잡고 말씀하셨어요.
“베토벤 곡, 정말 감동적이었어요.”
순간 조금 놀랐어요.
제가 방금 연주한 건 도호나니와 브람스였거든요.
마음 속으로 ‘내가 워낙 베토벤을 좋아해서 다른 곡도 베토벤처럼 연주하고 있나?’ 싶기도 했지만,
사실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어요.
그 한마디 속 감정,
그 손끝의 따뜻함,
그분들의 황혼 같은 시간 안에
제가 잠시 머물 수 있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저는 충분했어요.
“Don’t know why I’m frightened”
- 내가 왜 겁을 먹었는지 모르겠어요
“I know my way around here.”
- 이곳은 내가 잘 아는 공간이니까요
그때 알았어요.
나는 결국 이 무대로 돌아올 사람이었구나.
5. 황룡이 지나간 자리, 영산강 이야기
남도의 영산강엔
예부터 한 마리 용의 전설이 흐르고 있었어요.
동이 틀 무렵, 담양 용소에서
용 한 마리가 물줄기를 박차고 하늘로 솟구쳤다고 해요.
그 용은 물길을 따라 하늘로 오르며
자신의 금빛 비늘을 하나씩 떼어내
세상 곳곳에 흩뿌렸다고 해요.
비늘을 떼어낼 때마다
그 자리엔 무지개가 피어오르고,
사람들 마음엔 조용한 위로가 내려앉았다고 해요.
그래서였을까요?
영산강을 따라 걷다 보면
흔들린 마음도,
가슴속 슬픔도
잔잔히 가라앉는 기분이 들어요.
그건 마치 굿의 장단처럼
눈물은 흔들리고,
기쁨은 춤추는 듯한 느낌.
피아노 위에서
음 하나, 쉼표 하나가
황룡의 비늘처럼 누군가의 마음에 닿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Feel the magic in the making”
- 극이 만들어지는 그 순간의 마법을 느껴요.
“Yes, everything’s as if we never said goodbye.”
- 그래요, 마치 우리는 한 번도 이별한 적 없던 것처럼요.
지금도 가끔 생각해요.
나는 오늘의 연주로
황룡의 비늘 하나쯤,
어디에 떨구고 왔을까… 하고.
6. 무지개는 건반 사이에
연습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몸은 지쳤지만
마음은 묘하게 가벼워질 때가 있어요.
무엇을 이뤘기 때문이 아니라,
그날의 나 자신을
다시 붙잡았기 때문이에요.
“I’ve spent so many mornings just trying to resist you”
- 나는 아침마다 당신을 외면하려 애썼어요
“I’m trembling now.”
- 하지만 지금은 그 떨림조차 받아들여요
떨림도,
고심도,
불완전한 하루들도…
모두 무지개를 향한 연습이었는지도 몰라요.
7. 수줍은 용도 언젠가는
계룡산의 수줍은 용은
아직 날지 못했지만
하늘을 향한 몸짓만은 분명했어요.
저도 그래요.
아직은 매번 완벽하진 않지만
오늘도 피아노 위에서 무지개를 만드는 중..ing.
“So watch me fly, we all know I can do it.”
- 그러니 내가 날아오르는 걸 지켜봐요, 우리 모두 내가 그럴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저는 오늘도
다시 피아노 앞에 앉습니다.
마음속으로 조용히 말하면서요.
“그래, 오늘도 괜찮았어.”
“무지개는… 이미 피고 있었던 거야.”
출처: YES24 책소개 이미지 캡처 (비상업적 인용 목적)
원서: 『영산강 이야기』 / 글 방승희 · 그림 정인성·천복주 / 모해출판사 (2022.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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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credit: ‘La belle Fleur’(blog)
Presumed location: Oxford, U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