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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소라미 Jan 27. 2022

내 아이가 내 어린 시절을 위로해주던 날

상처는 혼자 긁지 말고, 꼭 나누기로 해

아이들과 저녁을 먹다가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숙제를 마치고 색종이 준비물을 사러 가려고 했어. 그때는 부모님들이 바쁘게 일하던 시절이라서 1학년이라 해도 혼자서 준비물도 사고 두부 심부름도 하고 그랬던 것 같아. 우리 부모님도 가게를 하셨고 늘 밤늦게까지 일하셨지. 가게랑 집이 가까워서 교대로 왔다 갔다 하셨고. 용돈은 따로 안 받았어. 대신 엄마 그니까 너희 외할머니가 수납장안에 준비물이나 과자 사 먹으라고 빨간 동전지갑을 넣어두셨지.

색종이는 50원이라 딱 50원이 필요했어. 문구점에서는 100원짜리 색종이도 팔았지만, 그건 양면이고 50원짜리는 단면이라서 난 항상 50원짜리만 샀거든. 근데 그날따라 50원짜리 동전이 영 안 찾아지는 거야. 그래서 지갑에 있던 돈을 조금 바닥에 쏟아봤어.

짤랑짤랑 핑그르르 칭칭칭.
방안은 동전들이 나뒹구는 소리로 요란했지.

우리 집은 단칸방이었고, 엄마는 낮잠을 주무시고 계셨단다.

엄마가 깜짝 놀라 후다닥 일어났어 그리고는 옆에 있는 무언가를 집으셨지. 그건 머리빗 혹은 빗자루였을까? 기억이 잘 안나. 당시 엄마는 늘 고단했으니, 모처럼 단잠을 자다 깬 자체에 화가 난 거겠지. 난 잘못했다고 빌었지만 엄마는 매를 멈추지 않았어. 결국 억울함에 울부짖었던 같아. 색종이 살 돈이 필요했다고. 울다 지쳐 잠들었고 저녁때 부스스 일어나 보니 엄마는 다시 가게로 나가고 없었어.

그리고 내 책가방 옆에는 양면 색종이가 놓여있었지.


둘째 아이의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 빗자루 이야기가 나올 때부터 코를 훌쩍거리더니 마음이 아팠나 보다. 왜 눈물이 났는지는 묻지 않았다. 담담히 다음 말을 이어갔다.


"그래서 엄마가 너희들 체벌 안 하게 된 거야. 난 내 아이는 절대로 때리지 않겠다고 그때부터 다짐했던 것 같아."


아이는 눈물을 닦으며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내 아이가 8살의 나를 위로해주는 느낌이었다.  어린 소녀는 양면 색종이로 표현된 엄마의 미안함을 알아채지 못한 채 그날을 상처라 불러왔다.


엄마와는 지금도 원만한 사이를 유지하고 있지만, 원만이라는 말에는 왠지 모를 건조함과 아쉬움 묻어난다. 엄마와 나의 마음이 서로 닿았던 기억이 아득하기 때문이려나. 아니, 내 기억에만 없을 뿐, 어쩌면 엄마도 나에게 위로받고 싶었던 당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했을 수도 있다. 내가 눈물로 보듬고 손을 내밀지 않아서, 엄마는 미안하다는 말을 너무 아껴둬서 적당히 원만한 관계로만 남은 건 아닐까.




숙연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듣고 있던 큰 아이가 입을 열었다. 


"뭔가 슬프네. 할머니도 엄마도."

그리고 말을 이어갔다.


"엄마, 3학년 때 선생님이  잘못도 없는데 따로 불러서 혼내고 차별해서 상처받았었잖아. 선생님이 내 그림 보고 징그럽다고 해서 설명했더니 변명을 좋아하는 아이라며 나무랐지. 거짓말 잘하던 반 친구 말만 듣고 내가 딴 친구를 괴롭혔다고 야단치고. 난 그런 적이 없는데 영문도 모르고 혼났어. 게다가 난 평소에 말썽 부리거나 친구들 해코지하는 애는 아니었잖아. 오히려 상처받는 쪽이었지."


"근데 내가 어리둥절한 채 야단맞고 온 날 계속 우니까 엄마가 선생님한테 전화해서 말해줬잖아. 선생님이 오해하고 계신 게 있는 것 같다고. 나랑 오해 풀고 좋은 선생님으로 기억되면 좋겠다고. 결국 그 선생님은 나와 오해를 풀 시도조차 안 했고 최악의 선생님으로 기억되었지만 엄마가 참 고마웠어. 그런데 지금도 가끔 생각나. 그 이후 1대 1 면담 트라우마도 있고. 가끔 마음이 힘들어."


이제 막 15살이 된 아이의 뒤늦은 고백에 말없이 안아주었다.


언제든 힘들면 다시 꺼내서 말하라고 했다. 엄마는 30년도 더 된 이야기를 아직도 다 못 털어내서 이렇게 꺼내는데 넌 고작 5년 전이니 더 생생할 거라고.


그때마다 이렇게 10살의 너를 위로해주겠다고.


시간이 모든 걸 해결해주지는 않아. 위로받고 치유받지 못한 상처는 수십 년이 지나도 결국 곪더라. 그러니 언제든 또 꺼내서 마주하렴. 그러다 보면 딱쟁이가 생기고 단단히 아물어서 새살이 돋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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