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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소라미 Jan 11. 2022

넘어져도 부서지지 않으면 괜찮아

똑바로 떨어진 맥주병의 진실

햇살이 남긴 온기 위에 시원한 바람이 스치던 9월, 남편의 최애 곱창을 먹으러 갔다. 최애 라고 하기엔 최애가 너무 많지만 어쨌든 그날은 곱창이 최애였다.


개방식 폴딩 도어를 펼쳐 노천 식당처럼 즐길 수 있다는 장점 때문인지 초저녁부터 손님이 바글바글했다. 손님이 많아 살짝 멈칫했지만, 이미 두 곳의 식당에서 만석을 보고 나온 터라, 빈 자리가 있다것만으로도 감사했다.


사실 선택의 자유가 주어진다면 붐비는 맛집보다는 한적한 식당을 선호하는 편이다. 손님이 꽉 찬 식당을 꺼리는 이유는 세 가지인데, 시끄러워서 나도 시끄럽게 목청을 높여야 대화가 된다는 점, 음식이 빨리 안 나온다는 점, 수요 공급의 불균형인지 차가운 맥주를 마실 확률이 현저히 떨어진다는 점(생맥주를 파는 식당은 예외) 때문이다.


한심하게도 이중 가장 신경 쓰이는 부분은 세 번째 이유였다. 맥주는 아주 차갑게 먹어야 한다는 지론을 가진 사람이라, 맥주의 온도에 유난을 떤다. 집에서 캔 맥주를 마실 때조차 글라스에 한잔을 따르고, 나머지는 냉동실에 넣어둔다. 온도의 상승을 최대한 막고자 함이다. 차가움에 아쌀함이 더해지는 쨍한 느낌이 좋다. 그래서 생맥주도 같이 파는 음식점을 좋아한다.


그 곱창집에서는 생맥주를 팔지 않았기에, 병맥주를 시켰다. 확률대로 맥주는 미지근했고, 꿀꺽꿀꺽 넘어가지 않았다. 깨작깨작 따라 마시다 마음마저 멀어졌는지 손을 멀리 뻗어 테이블 저편으로 놓았다.


순간,

맥주병이 수직 낙하했다.


'아, 망했다'의 "망"자를 말하려는 순간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다.

맥주병이 그 자세 그대로 착지한 것이다.


이후 잠시 기우뚱하더니 비틀거리다 옆으로 쓰러졌다. 하지만 낙하할 때 온 바닥으로 충격을 흡수한 것인지 쓰러져도 깨지지 않았다. 옆으로 누운 채 남아 있던 맥주가 약간씩 흘러 넘칠 뿐이었다.


종업원 분들에게는 아찔한 소란이 너무나 죄송했지만 깨지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다른 손님이나 가족에게도 피해가 가지 않았다.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날 밤, 자려고 눈을 감았는데 자꾸만 수직 낙하하는 맥주병이 아른거렸다. 10점 만점에 10점 착지는 아니었으나 어떻게든 서 있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결국 넘어졌지만 부서지지 않았다.


나 역시 인생길 굽이굽이 마다 수도 없이 떨어지고 넘어져왔다. 아프고 쓰렸다. 다시는 못 일어날 것 같은 두려움에 넋 놓고 앉아 울기만 한 적도 있고, 억울하다며 누군가에게 하소연을 하기도 했다. 에라 너도 당해봐라라는 심산으로 소심한 복수를 꿈꾼 적도 있다.


훌훌 털고 일어난 기억은 몇 안된다. 넘어졌다는 자체에 집착하며 기운을 빼고 생채기를 긁었다. 부스럼이 나고 멘털은 조각조각 흩어졌다. 왜 넘어진 건지 조차 잊게 되었다. 멋지게 나이 먹지 못하고 자꾸 실패하는 내가 쪽팔렸다. 넘어진 데다 마음마저 부서졌으니 일어나는 데에는 오래 걸렸다.


쉬이 일어나지 못했던 건, 숨겨왔던 나의 초라함이 들켜버렸다는 수치심과 부족함에 부족함이 더해졌다는 자괴감 때문이었다. 나 그대로를 바라보고 귀하게 생각했다면 넘어진 스스로에게 일어나면 된다고 위로와 용기를 냈을 텐데.


오늘 맥주 한잔 하고 나니, 문득 그 맥주병이 떠오른다.


실패하는 순간은 올거다. 하지만 설령 달려가던 길의 끝에서 떨어지더라도 이제는 정신 똑바로 차리고 착지해보자고, 착지하다 넘어져도 자멸하지 않도록 스스로를 조금씩 더 사랑해보자고 다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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