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업무가 배정되어도 catch up 속도가 남달랐다. 야근을 거의 하지 않는 듯했지만 매번 질 좋은 결과물을 내놨고, 이슈 발생 시 판단도 빨랐다. 관리자라고 해서 메일로 큰소리치고 턱으로만 부리는 유형들과는 달랐다. 웬만한 엑셀 활용 스킬을 겸비하고 있었으며 지적 호기심 또한 왕성하여 직접 자료를 찾고 구조화했다.
20년 가까이 직장 생활을 하며 보아왔던 상사 중 가히 올타임 넘버원이었다. 인격이나 인품에 대해 평할 만큼 개인적으로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으나, 능력 있는 상사로서 배울 점은 분명 있었다.
그런 그녀가 6개월 전 회사를 떠났다.
이후 그녀가이끌던 조직은 와해의 조짐을 보였다(나 역시 그 팀의 일원이었으나 약 1년 전 옆팀으로 발령이 났다). 나름 똘똘한 직원들로 구성된 팀이었지만 소위 에이스 관리자 아래에서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던 활기가 없어졌다. 그렇게 표류하는 듯했다.
하지만 거대한 조직의 일원은 언제든 대체 가능하다는 만고의 진리대로, 그녀 역시 대체 가능한 사람이었다.
평소 그녀의 발끝에도 못 미칠 인물이라고 생각했던 옆팀 팀장이 그 자리로 옮겨왔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원대한 사업계획을 수립하고 몸집을 불리기 시작했다. 1~2주 걸러 한 명씩 경력직 직원이 입사했다. 그리고 우리 실에서 가장 규모가 큰 조직이 되었다.
난 구경꾼으로서 지켜볼 뿐이지만 이제는 체계가 갖춰져 무난하게 굴러가는 모양새다.
팀장 정도 레벨에 오르려면 중간 이상의 역량, 관리능력, 인정 욕구, 실무능력은 겸비했을 테니. 누구라도 그 정도 위치라면 직원을 쥐어짜던, 본인이 영혼을 갈아 넣던, 어떤 방법으로든 굴러갈 만큼은 해낼 수 있는 것이다.
현 조직으로 옮긴 이후, 나는 스스로에게 "경력이 애매한 대체 가능한 직원"이라는 꼬리표를 붙여왔다. 비영어권 외국어를 조금 할 줄 안다는 점과 기획 업무 경험이 있다는 부분을 제외하면 해당 분야에서의 경력은 대리급에도 못 미쳤다. 외국어 구사자를 필요로 해서 문외한인 나를 받아 준 것이니 서러울 것도 변명할 것도 없다는 건 불행 중 다행이지만.
남들이 3년, 5년간 갈고닦아온 경력을 단숨에 따라잡는다는 건 언감생심이었다. 마치 옆집 대학생 언니를 향한 초등학생의 부러운 시선과 같았다. 마음은 빨리 대학생이 되고 싶었지만 성장하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조직이 나에게 기대하는 것은 성장 잠재력이 아닌, 현재 역량에 기반하는 빠른 해결력이었다. 내가 조직장이었어도 이미 사고가 굳고 시야가 닫혀가는 40대보다 생각이 말랑말랑하고 스펀지처럼 쭉쭉 빨아들이는 더 젊은 직원을 더 기다려주었을 것 같다. 가성비 면에서도 그들이 낫다. 40대를성장시킨다는 말은 이미 시든꽃에 물을 주는 것이리라. 정성을 들이는 것에 비해 효익이 떨어질 테니.
따라서 연봉이 올라가면서 가성비의 한계가 보이는 시점에 다다르면, 회사는 나를 대체할 사람을 찾으며 압박해올 것이라고 여겨왔다.대체 가능성을 운명처럼 생각해온 것이다.
그런데 에이스 상사 부재이후의 세상을보며 조금은 생각이 달라졌다. 그들만의 리그에 속해있는 사람들조차 존재가 지워질 수 있음을 체감했다. 실패 한번 없이 연전연승으로 사장이 되더라도 영예롭게 퇴직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 것이다. 직위의 고저나 능력의 좋고 나쁨에 상관없이,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대체 가능한 존재구나.
모두가 거대한 조직의 도구에 불과하다는 굉장히 슬픈 이야기임에도 다 같이 같은 처지라는 점이 묘하게 위안이 된다. 보편성이 주는 위로라고나 할까.
한편으로는 서로 다를 바 없는 존재들이 하나라도 더 움켜쥐려고 아등바등하는 노력들이 부질없어 보이기도 한다. 마치 자신은 불사조가 될 것처럼 거드름 피우는 이들이 애처롭기도 하다. 어쩌면 그 날갯짓은 살기 위한 몸부림이라 생각하니 그들에 대한 불편한 마음이 조금은 거두어지는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