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소라미 Feb 05. 2022

새해 "일복" 많이 받으세요

통제 안 되는 상황을 통제하는 연습

설 연휴가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메일함에는 우선순위를 정하기조차 버거운 버라이어티 한 일들이 폭포수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정겨운 인사와 함께 시작되는 메일에는 "복"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무색할 정도로 요청 사항이나 이슈 공유로 빼곡했다. 이럴 거면 평소대로 그냥 건조하게 쓸 것이지, 복 받으라는 말은 왜들 하시는 건지.


새해 복 너의 정체는 뭐냐?

응 일복. 일복이 많아야 돈도 많이 벌잖아. 아 아니구나, 월급 쟁이니까 돈은 똑같이 버는구나. 일복 이놈! 감히 복이라는 신성한 언어의 탈을 쓴 악당임이 틀림없다.


연휴 마지막 날 나의 수면 시간은 고작 2~3시간밖에 되지 않았다. 회사에 가기 싫었는지 유난히 잠을 설치던 밤이었다. 돌덩이 같은 몸과 마음을 질질 끌고 회사에 나가 심호흡할 새도 없이 쏟아지는 일복을 마주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대부분은 확인하고 조율해서 정리해야 하는 일들이었기에, 빨리 답을 구할 수 없는 장애물 투성이였다. 일복 터진 것도 숨 막힐 지경인데 해결이 되지 않는 요소들이 활화산처럼 분출되니 도망가고 싶어졌다.


36계 줄행랑이 최고의 병법이라던데, 나도 이 병법을 써봐?

퇴사 카드를 다시 한번 만지작 거린다.


to do 리스트 속 나의 일과들은 내가 통제할 수 있는 범주 밖의 일들이 많았다. 분주하게 움직였지만 진도가 안 나가니 꽉 막힌 도로 한가운데에 있는 듯 답답함이 밀려왔다. 속절없이 시간만 간다는 불안감에 체력과 집중력 저하가 겹치면서 피로가 쌓이고 있었다.


머리는 해야 한다며 고삐를 더 단단히 쥐지만 몸은 도망가고 싶다고 말을 할 때, 마음은 균형을 잃고 무기력에 빠진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고 해봤자 안될 거라며 침잠하게 된다.


결국 "내일의 나"에게 미루고 퇴근했다. 그리고 "내일의 나"는 다음날 아침 8시부터 업무를 시작했다.


좀 더 회사에 다니기로 한 것은 나의 선택이지만, 계속 다니는 것과 그만두는 것을 결정하는 것 외 대부분의 상황들은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영역 밖에 존재한다. 어쩌면 통제력의 부재는 월급과 시간을 등가 교환하는 직장인의 숙명일지도 모른다.


출근 전이나 퇴근 후에 딴짓들을 하며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영역들을 넓혀가고 있지만,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는 직장에서는 영영 찾을 수 없는 것일까?  회사에서는 월급 외에 특별한 목표나 하고 싶은 일이 없기 때문인 걸까? 또 다시 통제 앞에서 무력감을 느낄 때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할까?


"내일의 나"의 직장 일과는 결국 한숨으로 시작해 한숨으로 끝났다.




찌뿌둥한 몸과 마음을 이끌고 요가 학원에 갔다.


"오늘은 균형 잡기와 골반 스트레칭에 집중해보려 합니다." 요가 선생님의 부드럽지만 단호한 수업 설명이었다.


시퀀스 중간쯤 가자 선생님은 한쪽 다리를 들고 외다리로 버티는 동작을 주문했다. 고난도 수련은 아니라서 평소처럼 부담 없이 시도했는데 바들바들 부르르 떨리는 느낌이 평소와는 달랐다. 결국 공중에 있던 발이 떨어지면서 지탱하던 다리가 콩콩콩 움직이며 균형을 완전히 잃었다.


내 동작에 내 마음이 비친 걸까? 비틀대며 지나온 하루들을 들켜버린 기분이었다.  


"흔들려도 괜찮아요. 다리가 떨어져도 다시 올라가면 돼요. 내가 할 수 있는 범위에서 하시면 됩니다."


그래. 안될 때 억지로 하는 건 부상의 위험이 있다. 내 몸이니 내가 제일 잘 안다. 이게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곳에 다다르면 그냥 머물러도 된다. 마음도 마찬가지일 거다.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부딪칠 때, 몸부림치거나 애쓰는 대신 충분히 잘하고 있으니 무리하지 말자고 다독이는 것이야말로 내가 할 수 있는 통제 범위일지도 모른다.


to do 리스트 속 진도율이 100%가 안되더라도 어쩔 수 없다고 놓아보는 것

어차피 빨리 해결 안 될 일에 집착하지 않는 것

책임의 부담이 크다면 내려놓는 것

완벽하지 않아도 뻔뻔한 것

하기 싫은 일도 처음 해보는 요가 동작처럼 도망가지 않고 일단 시도해 보는 것

안되면 할 수 있는 것만 하고 36계 줄행랑치는 것

평가가 좋지 않아도 그냥 월급 받고 사는 것

나이 어린 상사가 나대서 자존심이 상하더라도 지나가는 경험이라며 스스로를 어루만지는 것

출근 전이나 퇴근 후에는 감정에 매몰되지 않고 잽싸게 좋아하는 일들을 하는 것

기분 전환할 딴짓거리들을 많이 만들어 놓는 것


생각보다 할 수 있는 것들이 많구나. 글로 풀어내니 생각이 정리되면서 위안이 된다. 최애 딴짓 중 하나로 글쓰기를 선택하길 잘한 것 같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