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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소라미 Feb 12. 2022

목표 대신, 사표 내면 안될까요?

일단 꾸욱 눌러담고, 퇴근

지난 한 주 동안 보고만 4 건이었다. 하나를 끝내면 숨 돌릴 여유도 없이 또 다른 것을 시작해야 했다.


마음에 여유가 없어지니 작별을 고했던 옛 습관이 되살아났다. 끼니를 거르고 간식으로 배를 채웠다. 화장실 가는 시간이 아까워 참기 시작했고, 웃는 법을 잊었으며 매 순간 미간을 찌푸렸다.


이렇게 쉽게 무너지다니 야속했다. 의식적으로 좋은 습관이나 생각들로 울타리를 치고 방어했을 뿐, 나쁜 습관들은 여전히 내 주위를 돌며 느슨해지는 틈을 노리고 있었나 보다.


그리고 그 틈이 벌어지는 순간, 다시 내 안에 자리 잡기 시작했다.


당연한 결과겠지만 소화불량과 방광염, 불면증이 찾아왔고, 불안, 초조, 예민의 나쁜 감정 3종 세트의 기운은 점점 더 거세졌다.


그래도 이번 주까지만 고생하면 마무리되는 일들이기에 버텨낼 수 있다고 보듬었다. 결국 지나간다는 시간의 법칙을 위안 삼아 주말에 낮잠을 자거나 느긋하게 쉬고 있는 나를 상상했다. 그래, 며칠만 참자! 그러던 와중에 팀장의 메일이 도착했다.

 

"금주 금요일까지 22년 성과 목표 완료하세요."


아, 맞다. 이것도 있었지. 보고 건보다 더 귀찮고 신경 쓰이는 녀석이다.


목표 설정은 1월 말부터 시작되었다. 지난해와 올해 R&R에 변화가 있어 새로운 목표들을 만들어야 했고 이미 3번의 상신과 반려가 오갔다.


목표 설정 시즌이 올 때마다 시나리오 작가가 되는 기분이 든다. 언뜻 내가 주인공인 듯 하나, 알고 보면 전면에 나서서 분위기를 잡고 초반에 길을 터 주는 조연 역할이다. 지저분한 길을 청소하고, 반짝하게 닦아서 주인공이 편안하게 지날 수 있도록 길을 만든다. 길을 걷던 주인공이 땅이 비옥하지 않다고 지적하면 다시 땅을 고른다. 그가 원하는 꽃을 피우기 위해 씨앗을 구하러 나선다.  중간에 시들어버리면 얼른 다른 씨앗을 구해와야 한다.


꽃이 만개하더라도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건 내가 아닌 주인공이다. 내가 주인공의 성공에 박수를 쳐주면 그는 나에게 수고했다는 짧은 인사를 건넨다. 박수와 인사의 교환은 나의 노력이 만든 결과를 그가 가져가겠다는 암묵적인 거래다. 다시 나는 조연이 된다. 그나마 속은 쓰려도 박수를 쳐줄 수 있는 상황이 백번은 더 편하다. 매일 같이 물을 주고 가지를 쳐도 꽃 봉오리가 열리지 않거나 시들어버리면, 삽질만 하다 끝나는 한 해가 되기 때문이다. 나의 삽질은 그 누구도 인정해주지 않으며 이듬해에는 더 척박한 땅이 나를 기다린다.


오징어 게임처럼 잔인하지는 않지만, 오징어 게임만큼 룰은 냉정하다.


직접 쓰는 시나리오는 플롯이 명확하면서도 과정이 명료해야 한다. 월별 혹은 분기별 해야 할 일로 단단한 뼈대를 세운다. 12월에는 결국 성공하는 스토리로 목표를 설정하면서도 내년의 먹거리를 위해 열린 결말로 끝을 맺어야 한다. 마치 시즌제 드라마 같다.

 

S A B C D라는 평가 등급을 만들고, 실현 가능한 타깃은 "B"로 설정해야 한다. 무난히 달성할 것으로 보이는 평가 수치를 S로 삼으면, 예외 없이 반려된다. S 등급이란 SF 영화처럼 말도 안 되고 허무맹랑한 이야기여야 하며, 주인공의 눈과 귀가 번뜩일 멋있는 스토리라면 더 없이 좋다.


목표 수립 시즌만 되면 딸꾹질이 나오는 이유다. 계급 사회에서 아랫사람이라면 당연히 받아들여야 하는 섭리거늘 괜한 반발심에 마음의 횡격막이 자꾸만 고장이 난다.  


팀장은 이 시즌에 더욱 목에 힘을 주고 팀 단속에 나선다. 장악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는 것 같다. 나는 그 위치를 경험해보지 못했지만, 관리자 입장에서는 인사 및 평가라는 권력을 영리하게 사용하는 것 또한 자신의 능력이라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더욱 까다로운 목표 수치와 추진 방안을 요구한다.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가슴에는 서러움이 차오르기도 했다. 목표 말고 사표를 내고 싶다는 감정의 파도가 일렁였다.


금요일 5시 반, 모든 보고는 끝났다. 잠시 숨도 고를 겸 자리에서 일어났다. 물을 한 컵 따라 마셔본다. 주말에 편안하게 소파에 앉아 강아지를 쓰다듬고 있는 나를 다시 한번 그려본다. 남편과 맥주 한잔 기울이면서 한주 간의 수고를 서로 도닥여주는 따뜻한 장면을 상상한다. 이번 주 일단 힘든 일은 해치웠으니 아이들에게도 친절한 엄마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기분이 조금은 나아졌다.


6시, 목표 상신 버튼을 누르자마자 후다닥 짐을 챙겨 퇴근했다. 그리고 주말을 맞이했다. 한주 동안 고생했으니 달콤하게 충전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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