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의 계절은 늘 겨울이지만, 아주 가끔은 5월의 어린이날처럼 따뜻한 봄이 찾아오곤 한다.
바로 상사의 출장일이나 휴가일, 또는 단체 워크숍참석으로보직자들 모두가 부재하는 날이다.
어린이날은 평소와는 다른 텐션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어차피 일은 해야 하지만 감시나 통제에서 벗어난다는 사실만으로 해방감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 날 만큼은 불쑥 들어오는 디렉션이 없으니 계획대로 착착 업무를 진행할 수 있다. 시간 컨트롤이 용이해진 만큼 가속 없이 천천히 스텝을 밟을 수 있다. 자리를 비우거나 딴짓을 해도 눈치 볼 상사가 없기에 미뤄놓은 은행 일이나 짬짬이 안부 톡을 보낼 여유도 생긴다.
팀원들은 출근해서 자리에 앉자마자 상사의 부재 소식을 서로에게 상기해준다. 곧 오늘의 점심식사 장소를 묻는 메시지가 뜬다. 평소에 시간 제약으로 가기 부담스러웠던 곳이나 상사가 선호하지 않는 곳이 최우선 순위가 된다. 여직원끼리라면 파스타, 즉석떡볶이는 언제든 환영이다. 곱창을 포함해전골이나 초밥집도 항상 탑 5에 오른다. 남직원끼리라면 간단히 김밥이나 햄버거를 먹고 피시방이나 당구장으로 향하곤 한다.
점심시간은 대개 10분 일찍 시작한다. 산책 겸 해서 멀리까지 나서는 날은 깔깔깔 웃음 데시벨이 평소의 10배는 되는 듯하다. 금요일이라면 한층 업이 된다. 어린이날을 맞은 아이들처럼 이 날의 존재만으로도 즐겁고 행복한 표정이다.
어린이날에 대한 예의상 10분쯤 늦게 사무실로 들어온다. 오후 업무 시작. 제발 아무도 내 어린이날을 방해하지 말아 다오. 한껏 느긋하게 일을 하다 퇴근하고 싶다. 일을 안 하겠다는 건 결코 아니니 오해하지 마시기를. 다만 이날 하루만큼은 긴박과 불안은 안드로메다로 날려 보내려는 것.
모처럼 숨이 쉬어지는 휴식 같은 하루를 보낸다.
신체 성장은 25년 전에 멈췄고, 성인이라 불린지도 20년이 넘었으며 직장인이 된지도 20년 가까이 된다.
그래. 완연한 어른이다.
취업을 해야 하니 취업을 했고, 가족이 생기면서 책임감이 늘었다. 다양한 삶의 형태를 존중하지만 나에게 최선은 경제 활동을 계속하는 것이었다.
때론 농땡이라도 피우면서 일상으로부터 멀리 달아나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어른이라서, 어른이기에 일탈의 범주는 제한적이었고 성실하게 책임감 있는 어른으로 살았다.
허나 슬며시 고백하건대, 마음 한 구석에는 아직도 어린아이가 있다. 놀고 싶고 떼쓰고 싶고 징징대고 싶어 하는 또 다른 자아다. 아무것도 하기 싫은 날은 구속받기 싫고 그냥 내버려 뒀으면 하는 치기 어린 마음이다. 부모님의 잔소리에 반항하고 싶고, 상사의 지시를 거스르고 싶은 사춘기 아이의 삐딱함도 있다.
이런 마음이 들 때마다 스스로를 다독이며 성숙한 어른인 척 행동한다. 미성숙함을 필터링 없이 전부 표출하면 어른으로 살아갈 수 없다는 걸 어른으로 살며 배워왔기 때문이다.
나이를 먹는다고 저절로 어른이 되는 게 아니라, 어린 내면을 다스려가면서 어른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어른이의 삶이다.
다만, 너무 억제만 하면 응축된 감정의 에너지가 언제 폭발할지 모른다. 내적 갈등과 스트레스는 누르고 감춘다고 없어지지 않기에 해소되도록 스스로를 도와줘야 할 것 같다.
그땐, 내게도 어린이날을 만들어 줘야겠다. 느슨한 하루를 보내고 하고 싶은 것도 마음껏 하도록 내버려 둬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