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권도, 운전면허증도, 공인인증서도 아닌 회사원에도 유효기간이 있다는 말은 처음 들어볼 수도 있겠다. 고용에는 다양한 형태가 있으며, 이 중 근로 계약서에 회사와 상호 약속한 근무 기간이 명시되어 있는 경우라면 계약기간이라 할 것이다.
유효기간은 말 그대로 회사원이라는 직업이 효력이 갖는 기간이며, 기한은 나 스스로 정한다. 그러니 계약기간과는 다르다.
이 꼴통 같은 시스템은 나 혼자 비밀리에 만든 것으로, 어떻게 하면 이왕 다니는 거 효율적으로 더 잘 버틸 수 있는가를 고민하다가 나오게 되었다.
퇴사를 고민하기 시작한 7개월 전과 비교해, 회사 분위기, 업무 환경, 상사와의 관계, 동기부여 정도, 일에 대한 보람과 성취도, 인정 욕구, 직장 내 인간관계 등 그 어떤 것도 변한 것은 없다.
애초에 회사라는 공간 혹은 집단의 성질이 그렇다. 소수의 결정권자를 이보다 약간 더 많은 수의 관리자들이 따르게 되며, 다수의 실무자들이 또다시 관리자들을 떠받치는 구조다. 이 과정에서 조직의 변화를 요구하는 극소수의 사람들은 따가운 시선을 받게 되고, 옳고그름과관계없이 소수의 혹은 혼자만의 저항이라는 외로운 싸움을 거치다 조용히 사라지게 된다. 아니면, 외적인 갈등으로까지 발전하지는 않지만 변화하지 않는 회사에 불만을 품고 내적 고민을 거듭하다 스스로 문을 열고 나가는 이들도 있다.
중이 싫으면 떠나야 하는 법이다. 불교 신자는 아니지만 어쩌다 보니 절간을 떠나길 결심한 중이 되었는데, 당장 뛰쳐나올 수는 없어서 일단 머물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나는 스님들처럼 수행을 하러 직장에 들어간 것이 아닌, 그냥 사람이다. 심지어 예민하고 민감하며 감정 기복마저 심해 내공마저 부족한 어른이다.
그렇다 보니 언제까지 어떻게 버텨야 할까는 내게 가장 큰 숙제가 되었다.
우선은 현실적인 접근, 그러니까 경제적 이득을 기준으로 적정한 퇴사 시기를 생각해봤다.
해마다 1월 또는 2월이면 성과급이 나온다. 그러니 1, 2월에는 경솔하게 떠날 수 없다. 3월은 어떤가? 연봉이 인상되고 인상 소급분이 나온다. 즉, 3월 말까지는 뽑아 먹을 것이 있다. 4월부터는 지루한 평달이 시작된다. 무려 12월까지. 일단 시기적으로는 내년 3월이 가장 적절한 퇴사 타이밍이다.
이제 심리적인 접근으로 이동해본다.
내년 3월은 1년이나 남았으니 아득하게만 느껴진다.
물론 나 혼자만의 계획이므로 스스로 이를 허물어버릴 권리는 있다. 하지만 그 사이에 이판사판이라며 사직서를 던져버리는 무책임한 행동은 하지 말자고 다짐한 터다. 즉흥적으로 결정할 거였으면 여태까지 눈물을 삼켜가며 버텨온 시간들이 무용이 될 것 아닌가.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내가 정한 기간까지 인내하면서 깔끔하게 마무리하고 싶다.
게다가 이후의 직업으로 무엇을 선택하든 간에 새로운 도전이 될 것이다. 조금씩 압축해서 준비를 해나가고 있는 상황인데, 갑자기 퇴직해버리면 이후의 삶도 흔들릴 것 같다. 즉흥적인 퇴사는 분별없는 감정 상태를 만들어 스스로를 지나치게 다그치거나 무력하게 만들지도 모른다. 기우일지 모르나 그만큼 퇴사와 그 이후의 인생에 대해 비장하다.
하지만 1년이나 무작정 버틴다는 다짐은 스스로에게 불친절한 To Do가 될 수도 있다. 좀 더 친절한 해결 방법은 약간의 여지를 두는 것이고, 이에 6개월에 한 번씩 유효기간을 갱신하는 시스템을 만들게 되었다.
여름휴가를 마치고 복귀하는 8월 초에 연장 여부를 결정하기로 했다. 그때 도저히 견딜 수 없다면 9월 중에 그만두어도 괜찮다는 옵션을 추가했다. 할만하다면 다시 연장해서 내년 3월이 된다. 그렇게 6개월에 한 번씩 내 마음을 들여다보고 해낼 수 있는 방향으로 선택해 나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