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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소라미 Jan 19. 2022

재택 근무일, 최소한 잠옷은 갈아입자

세수는 했나?

코로나 사태 이후 일주일에 2~3일 가량은 재택근무로 일하고 있다. 아침 8시 59분 출근 시스템에 체크를 하기 전까지는 오롯이 나만의 시간이다.


물론 그 사이에는 아이들 아침밥을 차려주거나, 강아지가 밤사이 남겨놓은 흔적들도 치워야 하지만 사무실에 출근하는 날에 비하면 더없이 여유롭고 한가로운 아침이다.


그러다 보니 여러 가지 일을 벌인다.


아침에 듣기 좋은 음악을 검색한다. 대개는 편백나무 향 같이 편안하면서도 나직한 음악들이다. 애정 하는 가요나 팝송도 많지만 몽글몽글하고 아련한 분위기라 아침엔 어울리지 않는다. 아침부터 젊은 날의 추억이 떠오르면 센티해질까 봐,  위로를 주는 음악에 빠지면 축축한 마음이 들까 봐 그런 건 진짜 필요할 때 듣기 위해 아껴둔다. 아침엔 고요한 시간을 방해하지 않으면서 조용하게 기지개를 켤 수 있게 해주는 이름 모를 음악이 딱 좋다.  


향긋한 허브티 티백을 하나 집어 들고는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포근한 온도의 물에 우린다. 은은하게 향기가 퍼지면서 코를 타고 들어오면 머리까지 맑아지는 느낌이다. 한 모금 입에 담았을 때의 차분함이 좋다. 커피와는 다른 느긋함이다.


그리고 아침의 일과를 적는다. 대개는 단순하다.


1) 필사하고 단상 적기

2) 독서하기

3) 요가 또는 간단한 스트레칭

4) 하루 계획 짜기 (대부분은 회사 업무다)

5) 이부자리 정리하기 (아직 남편이 자고 있는 시간이라 가장 뒤로 미뤄둔다)


미라클 모닝이나 거창한 다짐이라기보다는 일찍 잠에서 깨곤 하는 몸의 리듬에 맞춰 하고 있는 일들이다. 늦잠을 자는 날은 그냥 둔다. 하지만 은둔의 시간을 즐기는 자체가 즐겁다. 하루의 시작이 성취감으로 꽉 차면서 마음이 가뿐해진다. 사무실로 출근하는 날에는 결코 느낄 수 없는 비움 혹은 채움이다. 정확히 무슨 기분인지는 잘 모르겠다. 몸과 마음이 가벼워 날아오를 것 같으면서도 두 발로 단단히 서서 비바람에도 끄떡하지 않을 것 같은 묵직함이 있다.


어느 광고에서 "참 좋은데 뭐라고 표현할 방법이 없다"라고 표현한 것처럼, 나도 그렇다. 그냥 좋아서 계속하고 싶다.


아침 일과를 마치고 나면 어느덧 1시간 반이 흐른다. 아이들이 깨면 간단히 아침을 차려주면서 나도 끼니를 때운다. 시계를 본다. 8시 50분이 다 되어간다.



이제, 고요한 감성은 와장창 깨지고 현실로 돌아와야 할 시간. On & Off.


그래. 출근일이었지! 회의가 있는 날에는 머리라도 감아야 하는데 시간이 촉박하다. 일단 머리부터 감고 나오자. 겨우 8시 59분에 출근 체크를 하고, 단톡방에 인사를 한 후에 드라이기를 들고 욕실로 간다. 9시를 훌쩍 넘긴 시간까지 자리를 벗어나 있는 건 제 발이 저린 탓에 다른 한 손에는 핸드폰을 들고 수시로 메일이나 채팅을 확인한다.


역시 아침부터 바쁘다. 재택 근무일이라고 해서 나른한 하루를 보낼 수 있는 건 아니다. 9 to 6로 저당 잡힌 몸이니 수시로 전화가 오고 메일이 온다. 실시간 대응은 못하더라도 내용 파악은 하고 하루를 마쳐야 할 것이다. 아침에 계획한 것의 진도율을 체크한다. 오늘 안에 못할 것 같다면 30%, 50% 이런 식으로 진도율을 적어둔다.


점심시간이다. 아이들이 방학했으니 점심식사 당번은 당연히 나다. 12시가 되기가 무섭게 밥을 찾는 사춘기 아이들이다. 점심시간에 가급적 배달 음식은 시키지 않기로 다짐했기에 중간에 한숨 돌릴 때 냉장고 식재료를 미리 확인해둔다. 대개는 원푸드로 때우거나 분식을 곁들인다. 전날 해둔 김치찌개나 된장찌개가 있다면 best다. 아이들 점심을 차려준 후의 선택지는 두 갈래다.


나도 한 숟갈 뜨거나, 설거지를 하거나.


점심시간은 1시까지이기에 나도 밥을 먹고 설거지까지 하려면 촉박하다. 꼭 1시에 밥 먹자마자 연락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나름 최대한 나의 점심시간을 배려해주는 것일 거다. 나 역시 점심시간 중에는 절대 전화를 받지도 걸지도 않는다. 그러니 1시 이후의 전화는 받아주는 것이 맞다. 대개 반은 점심을 먹고, 반은 설거지를 한다.


그나마 선택을 할 수 있는 날은 예사로운 거다. 1시에 회의가 있는 날이면 절로 예민해지고 정신이 쏙 빠진다. 아이들에게 밥 먹은 건 스스로 치워달라며 날카로운 잔소리를 던진다. 이윽고 깨닫는다.


내가 여태 수면잠옷을 입고 있구나!라고.


최소한 상의는 회의 참석이 가능한 옷으로 갈아입었어야 하는데, 머리 감는 데 급급해 잠옷을 입은 채라는 걸 몰랐다. 로션은 발랐나? 볼을 만져본다. 매끄러운 것 같다. 잠옷 입고 회의 참석하는 것보다는 1분 늦는 게 낫겠다. 줌 접속에 30초는 로딩 시간이 걸리니 일단 접속해두고 후딱 티셔츠로 갈아입는다.


그리고 생각한다.


아침의 고요 고독 은둔 즐거움 쾌적함 느긋함 느슨함 다 좋은데 제발 5분 전에 스위치를 전환해서 잠옷은 갈아입자고. 이것만 지키면 그나마 분주하거나 혼란스러운 점심 시간이 되지는 않을 거라고.


아직은 월급쟁이라서 9 to 6는 지켜야 한다. 자유로운 삶을 찾는 건 좋지만 최소한의 균형은 맞추면서 살자고 다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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