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소라미 Feb 20. 2022

생일인데 미역국을 안 끓여준다고?

그날은 그냥 행복하면 됩니다

언젠가 식탁에서 딸아이가 말했다.


"요리 초보는 레시피를 보고 만들어도 똥망인 사람이고, 요리 중수는 레시피를 따라 하면 어느 정도 맛이 나오는 사람, 요리 고수는 레시피 없이 스스로 요리를 할 수 있는 사람, 요리의 신은 할머니"래요.


그리고 덧붙였다.

"엄마는 레시피를 보면 따라는 하니까 중수는 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래도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건지? 부끄러워해야 하는 건지? 스스로를 향한 아리송한 물음에 괜스레 입술을 움찔움찔 거린다. 아마도 민망한 쪽에 가까웠나 보다.




며칠 전 남편의 생일이었다.


나에게 직접 연락을 하시지는 않지만, 지난 15년간 시어머니는 남편 생일날 아침이면 그에게 전화해 미역국은 먹었냐고 물으셨다. 제 아무리 바쁜 며느리라도 당신 자식 생일은 챙겨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으셨나 보다. 반항은 아니었으나, 지금껏 어머니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한 번도 남편 생일날 아침에 미역국을 끓여준 기억은 없기 때문이다. 남편 역시 내 생일날 제 손으로 미역국을 끓여준 적이 없다. 네가 안 하니까 나도 안한다라기 보다는 우리 둘 다 "생일 아침 미역국"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는 공통점이 있기에 받지 않아도, 해주지 않아도 아무렇지 않은 것이다. 심지어 둘 다 아침 식사는 밥 대신 간단한 요기만 하니 아침 미역국은 더 형식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


생일을 며칠 앞두고 다 같이 외식을 한 터라, 생일날 저녁에는 집에서 식사를 하기로 했다.


남편이 좋아하는 메뉴를 시켜먹을까 하다가 1+1으로 사다 놓은 돼지고기가 생각났다. 내가 레시피를 보지 않고도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메뉴 중 하나가 제육볶음이다. 갖은양념을 다 때려 넣을 뿐인데 식구들은 그렇게 맛이 있다며 엄지를 치켜세워준다. 평생 요리 초보와 중수 사이를 애매하게 왔다 갔다 하겠지만 제육볶음은 레시피 없이도 끼깔나게 만들 수 있으니 잠시 요리 고수가 되는 느낌이다. 고기에 양념을 무치기 시작했다. 채소를 좋아하는 남편을 위해 양파 1개를 몽땅 썰어 넣었다.


냉장고에는 두부도 있었다. 된장찌개 역시 아무 생각 없이 뚝딱 만들 수 있는 메뉴 아니었던가. 남아 있던 채소들을 송송 썰기 시작했다. 설날에 친정 엄마가 싸준 전을 냉동실에서 꺼내 따끈하게 데워놓았다.   


매장 문을 닫고 조금 늦게 들어온 남편은 식탁에 차려진 밥상을 보며 감탄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와 잔칫상이네! 내가 좋아하는 메뉴들만 있잖아! 직접 차려줄 줄은 몰랐어. 정말 고마워."

"다른 집에서는 평범한 메뉴인데, 평소에 내가 밥을 잘 안 하니까 잔칫상이라는 말도 듣네? 히히"

"생일이 별건가? 내가 좋아하는 걸 먹는 게 행복한 생일이지!"


어머니! 올해 생일에도 미역국은 안 해줬지만, 아드님은 그날 저녁 세상을 다 가진 듯한 얼굴로 생일상을 맞이했답니다. 아드님이 세상에서 제육볶음을 가장 좋아하는데, 마침 제가 제일 잘하는 요리거든요.




몇 주 전 내 생일 전날, 여느 주말처럼 밤늦도록 술잔을 기울였다. 12시쯤 공동 현관문 호출이 왔다.


"아이고 야식 또 시킨 거야? 배불러 죽겠어."

남편을 향해 살짝 눈을 흘기며 말했다. 남편은 대식가는 아니지만 술자리에서 한 번 발동이 걸리면 탐식을 멈추지 못하는 습성이 있다.


"아이고 여태 나를 띄엄띄엄 보시네! 나 그렇게 막사는 사람 아니야."

남편이 장난기 어린 표정을 짓는다. 오른쪽 뺨의 보조개가 깊게 파인다. 결정적인 순간에 등장하며 연애기간을 포함한 지난 20년 동안 나를 들었다 놨다 해온 저 애증의 보조개.


12시에 도착한 건 내 생일 케이크이었다.

"얘들아, 나와라 엄마 생일 축하하자."


그날의 보조개는 꽤나 사랑스러웠다.


그래, 미역국은 형식일 뿐이야. 매년 돌아오는 생일날 당연하다는 듯 미역국을 끓여주는 예측 가능한 이벤트는 재미없어. 인생은 타이밍이지!

매거진의 이전글 이봐요, 당신이 왜 내 차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