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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소라미 Sep 19. 2023

야구가 밥 먹여주는 남자

너네 팀 이겨라~ 이기는 편 너네 편!

집안으로 들어서는 남편의 표정이 영 별로다. 나는 재빨리 네이버 스포츠 앱을 켜고 프로야구 결과를 확인한다.


'아이고, 또 졌구나."


그는 축 늘어진 어깨로 식탁에 앉는다. 미간을 있는 대로 찌푸리니 내천(川) 자가 아로새겨진다.


[남편] "흠..반찬이 이거밖에 없어?"


말투에 날이 서 있다. 평소에는 김에 김치만 있어도 잘 먹는 사람이 난데없는 반찬 투정을 시작한다. 그럴 거면 당신이 직접 해서 쳐드시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안 그래도 냉랭한 그의 마음이 더 차가워질 것이다. 이럴 땐 괜히 시베리아 바람을 일으켜서 살얼음판 만드는 것보다는 따뜻한 동남풍을 불러와 살살 녹여주는 처방법이 필요하다. 숨을 깊게 마시고 깊게 내쉬며 단전으로부터 훈풍을 끌어올린다.   


[나] "불고기 좋아하잖아. 계란 프라이라도 하나 얹어줄까?"

[남편] "입 맛도 없어."


연패를 했으니, 어지간히 속이 상한 모양이다.


남편이 응원하는 야구팀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일명 '크레이지' 모드로 무려 9연승을 구가하며 좋은 분위기를 타고 있었다. 이 흐름이라면 몇 년 만에 처음으로 플레이오프 진출까지 노려볼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 무렵 남편은 어떤 상황에서도 싱글벙글이었다. 강아지들이 배설물을 싸지르고 다녀도 본인이 먼저 치우겠다 나셨고, 아침이면 자진해서 아이들 식사를 챙겨줬다. 마땅한 반찬이 없다며 미안해하는 나에게 "김이랑 김치만 있어도 밥 잘 먹는 남자"라며 밥 한 공기를 뚝딱 비워냈다.


"요즘 기분 좋아 보이네?"

"응, 입맛이 도네. 잘하면 우승까지 노려볼 수 있을지 몰라."


하지만 천국의 맛도 잠시, 그 팀은 연패를 거듭하며 다시 아래 순위로 내려앉았다. 심지어 순위 싸움을 하는 팀에게 연속으로 패하면서 플레이오프는커녕 가을 야구 참가마저 불안해지고 있는 상황이다.



친정 아빠도 야구를 좋아했다. 야구 경기가 없는 월요일을 제외하면 TV는 늘 스포츠 채널이 몰려 있는 50번 언저리에 맞춰져 있었다. 엄마에게 채널 선택권이 주어지는 건 일주일에 한 번, 월요일 뿐이었다. 아차차, 비가 와서 취소 되는 날도 있었지! 비가 오는 날 아빠는 볼 프로그램이 없다며 투정을 부렸고, 잇몸이 만개한 엄마는 냉큼 KBS 1로 채널을 돌렸다.


야구 경기가 진행될수록 아빠의 목은 점점 더 TV와 가까워졌다. "목 빠진다"는 말은 누군가를 하염없이 기다릴 때 사용하는 애틋한 표현이지만, 우리 집에서는 아빠가 야구를 볼 때 흉보듯이 하는 말이었다. 집중력이 어찌나 대단하신지 엄마가 밥 드시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도 못 들을 때가 많았다. 그때마다 엄마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야구가 밥 먹여주나."


아빠는 식사를 하면서도 야구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저 투수는 어떻고, 저 타자는 어떻고 미주알고주알 웬만한 해설가 저리 가라 할 정도의 데이터를 쏟아내며 열변을 토했다. 그러다가 뜬금포라도 터질 때면 입안에 있던 밥알이 다 튀어나가는 줄도 모르고 "와~ 와~"하며 탄성을 질렀다.


"자자, 이제 밥 맛있게 먹어요."


엄마의 표정이 그제야 밝아진다. 엄마는 식사할 때는 눈앞의 음식에 집중해야 한다는 지론인지라, 아빠가 박빙의 상황에서 밥보다 야구에 더 신경을 쓰는 것을 못 마땅해했다. 점수차를 많이 벌려서 이긴다는 건 아빠가 편안히 식사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에 엄마는 아빠가 응원하는 팀이 늘 크게 이기길 바랐다.


그때마다 나는 '야구가 밥 먹여주는 거 맞네.'라고 생각했다.



어제도 남편의 팀은 피 터지는 순위 싸움에서 밀렸고, 우리 집 분위는 피가 말랐다. 오늘은 제발 그 팀이 이겼으면 하는 바람이지만, 하필이면 아빠가 좋아하던 팀, 다시 말해 내가 세습당한 팀이랑 붙게 되었다.


여담이지만 어릴 때부터 나에게는 팀에 대한 선택권이 없었다. 아빠는 늘 야구를 봤고 그 팀을 응원했기에, 나의 뇌는 익숙한 팀이 우리팀이라고 인식해 버렸다. 본디 뇌는 변화를 싫어하고 안정을 추구한다고 하니 어지간한 풍파가 일어나지 않는 한 팀을 바꾸기는 어려울 것 같다.


가끔 남편은 내가 본인 팀으로 갈아타서 같이 응원해 줬으면 좋겠다고 말하지만, '초대박 딜'이 아닌 이상 아마도 나의 뇌는 익숙한 것을 선호할 것이다. (그러니까 원하면 나에게 잭팟을 터뜨려줘!)


다만, 응원하는 팀의 성적이 밥맛을 좌우할 만큼 내 삶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지는 않기에 우리 팀이 져도 밥은 잘 먹는다. 그러니, 오늘은 부디 남편이 응원하는 팀이 이기기를 소망한다.


그가 마음 편안히 밥을 먹었으면 좋겠다.


+)평소에는 성격 좋은 남편인데 가을 야구 시즌만되면 예민해지네요 ㅜㅜ

팬심이 대단한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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