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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소라미 Apr 03. 2022

까짓 거 그냥 하면 되죠. 난 프로 노예니까

결이 다른 회사 노예로 살아볼까

얼마 전 직장 후배가 대형 사고를 쳤다.


사실 후배가 전적으로 잘못했다기보다는 유관 부서의 협조가 부족했는데, 본인 책임의 업무에 펑크가 났으니 마침 안고 있던 폭탄이 터진 격이었다.


수습을 위한 후배의 메일에는 "저의 불찰입니다. 죄송합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등등 흡사 반성문을 방불케 하는 사죄의 표현들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후배에게 사내 메신저로 위로의 메시지를 보냈다.

"에구 수고하셨어요. 괜히 맘고생 많았죠."


"아이고 선배님, 제가 악어의 눈물 좀 흘렸습니다. 우린 프로 노예 아닙니까?."

평소대로 유쾌하고 긍정적인 태도였다.


물론 후배가 100% 위선적으로 연기만 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본인 책임인건 알지만 혼자 떠안기에는 억울한 부분이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남 탓만 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최선은 아니 차악은 일이 더 커지기 전에 '내가 잘못했다고 손들면서 선제적 사과를 날리는 것'이라고 판단했던 듯하다.


그날 이후, 회사에서 핀치에 몰릴 때마다 후배의 멘트가 자꾸 떠올랐다.


"프로 노예 아닙니까."



몇 년 전 친구들이랑 우스갯소리로 노예에 관한 담론을 이야기한 적이 있다. 직원수 몇 만 명의 대기업, 알토란 외국인 기업, 스타트업, 상위 연봉 기업, 공기업 등 제각기 다양한 규모의 다양한 카테고리에 종사하고 있던 우리였다.


한 친구가 요즘 매너리즘에 빠져 일하기 싫어졌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회사 규모만 크지 의사결정도 늦고 윗사람 눈치 보는 임원들만 살아남더라. 일 잘러들은 다 그만뒀어. 일도 재미없고 동기부여가 안된다."

"그래도 복지도 좋고 누구나 들어가고 싶어 하는 회사잖아."

"그래 봤자 다 노예야, 대감집이냐, 신흥 양반이나, 공노비냐 사노비냐의 차이일 뿐 다 똑같지."

"와하하 맞네 맞아."


생각해보니 회사의 크기, 지위의 고하에 관계없이 월급쟁이라면 누구나 종속된 삶을 살고 있다. 상위 관리자가 메일 한통으로 ASAP을 요구하면 더 급하고 중요한 본연의 일은 미뤄둔 채 즉각적인 대응 체제를 갖춘다. 본연의 일이 턱끝까지 차 있어도 변명이나 양해의 말을 하기보다는 묵묵하게 대응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진다.


관리자들은 수시로 업무량과 월급을 저울질하며, 월급에 맞춰 혹은 그 이상으로 업무량을 늘리려하지만, 대다수는 이에 저항하지 못한다. 관리자 또한 상위 관리자로부터 똑같이 저울질을 당하며, 대개는 이에 순응한다. 연봉 인상 또는 동결, 성과급, 좌천, 강등, 혹은 임원 재계약 여부 모두가 저울질의 결과인 것이다.


직장인에게 월급은 생명수와 같기에 이런 시스템을 거스르는 일은 큰 용기를 필요로 한다. 들이박고 나가거나 그냥 나가거나. 혹은 다음 월급날까지 버텨보거나.


매일 쓴소리와 쓴잔을 마시며 월급날까지 버티다 보면, 통장 잔고가 늘어나는 달콤한 순간이 온다. 때때로 예속된 삶은 소속감이라는 심리적 안정감과 월급이라는 경제적 안정감으로 비치기도 한다. 나 홀로 울타리를 나와 광야에 서는 것보다는 누군가의 구속을 받으면서 노예처럼 사는 삶이 낫다고 생각할 때도 있다. 노력에 운이 더해진다면 인정이나 승진 등의 보상으로 돌아오기도 한다.


우리들이 스스로를 노예라고 폄하하면서도 월급쟁이 삶을 계속하는 이유다.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삶을 스스로 선택했다는 것이다. 회사 생활이 더럽고 치사하더라도 나의 선택에 따른 책임이므로, 마냥 신세한탄만 할 수는 없다. 월급을 받는 그날까지는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이때 필요한 것이 바로 프로 의식이다.


아마도 후배의 말을 되뇌게 되는 건, 단지 상황을 모면하려는 것만으로 들리지는 않았기 때문일 거다. 하루를 일하더라도 소극적인 자세보다는 눈 질끈 감고 해치워보겠다는 적극성이 도움이 될 수 있다. 각오를 단단히 하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태도, 해결에 초점을 두는 자세, 변명보다는 책임에 무게를 두는 의연함을 두른다면 일에 몰두할 수 있는 마인드셋이 갖추어지는 것이다.


이왕 좀 더 월급 받고 살기로 결정한 거, 결이 다른 프로 노예가 되어 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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