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증상은 계속 나타나고 있지만 하루 종일 누워서 끙끙 앓아야 하는 정도는 아니다. 무려 일주일의 여유가 생겼으니, 어쩌면 찬찬히 마음을 정리할 충분한 시간을 확보한 셈이다.
그동안의 경험을 상기해볼 때, 대개는 이런 시간이 주어지면 알아서 누그러지곤 했다.
남자 친구나 남편과 싸우고 나서 각자의 시간을 가지며 몰입하다 보면 왜 싸웠는지 조차 기억이 나지 않는 경우가 있지 않은가? 회사로 인한 분노 역시 시간의 흐름에 반비례하는 관계와 같았다.
하지만 이번엔 조금 다른 기분이다.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확고해지고 있다. 몸이 아파서 화를 내는 데에 사용할 에너지가 없는 건지, 분노 게이지 자체는 멈췄는데, 더 이상 머무르지 말아야겠다는 의지가 강해지고 있다.
계획적 사고와는 거리가 먼 전형적인 즉흥형 "P" 유형이기에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퇴사병은 아닌 건지 자문해보기로 했다. 밑도 끝도 없이 지극히 주관적인 기준에 따른 질문들이다. 나를 향한 질문들 안에서 답을 찾고자 기록의 방법을 선택했다.
1. 업무에 대한 애착은 어느 정도인가? 단순히 하기 싫은 것인가?
주 업무는 싫다기보다는 지겨운 쪽에 가깝다. 다양한 사람들과의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조정/조율하는 업무가 많은데 이 과정이 귀찮고 단순 업무임에도 챙길 요소들이 많아서 신경 쓰인다. 불쑥불쑥 연락이 오는 것도 반갑지 않으며, 예상치 못한 이슈가 터질 때마다 스트레스가 쌓인다. 이슈 자체보다, 해결을 위해 일일이 설명하고 조율하는 과정을 생각하면 마음이 무겁다. 3년째 맡고 있는 현재 업무에는 애정이 없다.
2. 상사에 대한 만족도는? 이 사람으로 인해 퇴사하려는 것인가?
1~10 판단할 때 4 정도 되는 것 같다. 최악은 아니기에 이 사람으로 인해 직장을 그만둘 정도의 레벨은 아니다. 그나마 장점은 직원을 쥐어짜지는 않는다는 점이고, 단점은 능력 없이 위로만 충성하는 성향을 가졌다는 점이다. 공교롭게도 그가 팀장 승진하면서 내가 후임자로서 일을 맡게 되었는데, 그가 챙기지 안 했던 이슈들이 발견되고, 과거에 기인한 문제가 터질 때마다 모르쇠 하거나 책임지지 않은 태도에는 줄곧 실망해왔다. 그동안 들키지만 않았을 뿐 이렇게 허술한 사람도 승진할 수 있다는 사실에 매번 놀랄 따름이다. 팀장은 나보다 나이가 어리고 사회 경험도 훨씬 적지만, 직무 경험이 많아 일찍 승진했다.
3. 불만 요소는 사람에 의한 것인가? 조직 문화나 구조로 인한 것인가? 개선 혹은 해결될 수 있는 건인가?
이 질문이 가장 임팩트가 있는 것 같다. 옆팀과 협업하는 프로젝트를 얼마 전 시작했는데, 옆팀 팀장이 직접 지시를 하고, 주도권을 다 가져간 상황에서 나의 팀장은 아무 역할을 하지 않으려 한다. 싸우기 싫어하는 성향 때문이려나. 이의를 제기하니 "옆팀을 도와야 하는 게 우리의 역할이고, 네가 할 일이다"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세상에 아무리 하찮은 일이라도 당연하게 시킬 수 있는 일은 없다. 이유와 목적 방향이 타당해야 하고, 납득할 수준이어야 한다. 도움만 주고 공과를 얻지 못하는 상황에서 기꺼이 소임을 다하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
사람 대 사람의 문제가 아닌 구조적 문제로 판단했다. 옆팀 팀장은 상위 관리자의 신임을 등에 업고 우리 팀을 종속시키고 휘두르려 한다. 내 팀장도 이런 구도를 알고는 있지만 좋은 게 좋은 것이라 합리화하며 나를 설득하고 있다. 자격지심 일지는 모르겠으나 "월급 받고 일하는데 뭐 이리 잔말이 많아?" 딱 이 느낌이다.
4. 업무나 기타 면에서 성장할 여지가 있는가?
1번 질문과 연결되는 것 같다. 직장 생활 19년 차이지만 경력이 한두 번 꼬이면서 최근 3년은 이전 경력과는 무관한 업무를 맡고 있다. 이제와 경력을 살려 이직을 하기도 애매하고, 평직원으로서 더 이상 올라갈 수 없는 직급이다. 심지어 수평구조이기에 중간관리자도 아니라서 성장이 멈췄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야구로 치면 나이 많은 즉시 전력감인데, 팀이나 회사의 기둥으로 성장할 재목이 아닌, 당장의 성과를 위해 잡다한 업무에 투입할 수 있는 자원으로 분류되는 것 같다. 롱런보다는 현재의 성적 내기 용이다. 또한 실력은 애매하지만 외국어 구사 능력이 있는데, 통번역 등 해당 언어를 하지 못하는 직원들의 tool로서도 활용되고 있다. 성장이라기보다는 사용에 초점이 맞춰진 것 같다.
5. 회사 생활을 이어갈 수 있는 동기 요소는 무엇인가?
가장 큰 요소는 정기 소득이다. 남편은 월급쟁이 생활을 하지 않기 때문에 내 월급은 안정적 가계 유지에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월급이 끊기면 아무래도 불안해질 것 같다는 걱정 때문에 회사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부수적으로 건강검진이나 병원비 지원, 금융 거래 등에서 유리한 측면이 있기도 하다. 회사 내에서 성취나 자아실현의 동기 요소는 충분하지 않다. 최선을 다해봤자 공은 윗사람에게 흘러들어 가고, 나의 공적은 리셋되어 또 다른 서포트 업무를 맞는 일이 반복되어 왔다.
6. 퇴사를 하고 싶은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궁극적인 질문이다. 나이나 포지션 상 성장하기 어렵고, 회사는 이러한 점을 십분 이용하려 한다. 공동의 목표를 표방하는 상사의 목표를 위해 당장 내 능력을 갈아 넣고 선봉에 나서 주길 희망하기 때문이다. 성장할 수 없다는 것을 역이용하는 것이다. 하지만 더 이상 누군가를 돕고 그들의 영달을 위해 희생하는 일에 보람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마치 내가 없는 느낌이다. 이렇게 사용되는 하루하루의 시간이 아까울 따름이다. 차라리 수입은 줄어들지언정 이른 퇴사 이후 남는 시간들을 새로운 분야에 도전하는 데에 투자하고 싶다. 하루라도 빨리 나의 성장을 위한 시간들을 확보하고, 나의 목표를 향해 시간을 쓰는 자유를 갖고 싶다.
7. 퇴사를 망설이는 이유는 무엇인가?
역시, 가계 안정이다. 이직도 아니고 창업도 아닌 일단 그만두기를 선택할 경우 당분간 혹은 그 이상 남편의 외벌이로 살아가야 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있다. 나 혼자만의 인생이 아니기 때문에 가족에게 미안한 마음이 너무나 큰 것이다. 목돈이 필요할 때 대출도 어려울 거고, 아이들도 그동안 누렸던 것을 포기해야 할 수 있다. 나 자신은 미니멀리스트로서 살아갈 자신이 있지만 식구들이 나 때문에 변화해야 한다는 것에 대한 죄책감이 생길 것 같다. (남편은 이것저것 다 따지면 결국 정년퇴직할 나이까지 회사일 하게 될 거라며 농을 치곤 한다. 그는 결단은 포기가 아닌 용기라는 응원을 해주고 있다). 이 외에도 19년 동안 소속이 없었던 적이 없다는 것 또한 발목을 잡아왔다.무소속에 대한 공포가 자유에 대한 열망보다 조금 더 컸던 것 같다.
포기와 용기 사이에서 여전히 흔들리고 있다. 제 아무리 깊게 뿌리를 박고 살아도 때로는 세찬 폭우에, 때로는 휘몰아치는 바람에 흔들릴 수밖에 없는 것이 인생이다. 완전하지 못하기에 언제든 흔들릴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휘청거리는 리듬을 타고 유연하게 균형점을 찾아가는 것, 균형을 잡기 위해 더 단단하게 중심(core)에 힘을 모으려 애쓰는 것이야 말로 지금 내가 찾아가야 할 답이 아닐까?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내려온다 해도 삶을 향한 중심을 잡고 일과 나 사이의 균형을 찾았다면 그것은 용기를 낸 포기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