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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소라미 Jul 03. 2022

퇴사 타이밍이 아주 NICE한 이유

최악이 아닌, 최선의 상황이 적기

지금 부서로 발령받기 직전, 이전 팀에서는 직장 생활의 바닥을 아니 바닥이 뚫릴 수만 있다면 그보다 한참 아래의 어딘가를 찍고 있던 시기였다.


업무는 점점 줄었고, 기회조차 소멸되고 있었다. 내 R&R 임에도 불구하고 회의 소집 명단에서 제외되기도 했다. 대신 특정되지 않은 긴급 지시들이 이어졌다.


잘 해내고 싶은 의지는 강했기에 쉽게 물러나지는 않았다. 숨 막히는 하루의 끝에서 "살다 보면 이런 일도 있는 거지."라고 위안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방출 명단에 이름이 올라갔다. 물론 공식적으로 웨이버 공시 제도가 있는 것은 아니나, 특별 관리 대상이 되었다. 필요로 하는 곳이 없다면 말도 안 되는 직무를 맡긴 후 스스로 퇴사를 선택하도록 하는 수순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지금 부서로 옮기게 되었지만, 이 분야에서는 경험도 경력도 없는 초짜였다. 나이만 먹어 부담스러운 백지 상태에 가까웠다.


부서를 옮긴 날 나를 반겨준 건 잡동사니들이 방치되어 있던 빈 책상이었다. 정식으로 채용한 것도 삼고초려로 스카우트해온 것도 아닌 떨거지 같은 나를 새로운 부서에서 두 팔 벌려 맞이해주기를 기대할 수는 없었다.


책상 위에는 10년도 더 된 서류 뭉치, 빈 상자들(아마도 샘플 박스였던 것 같다), 먼지가 수북한 소형 전자 기기, 뚜껑을 열어 놓은 탓에 물기 없이 말라비틀어진 물티슈 등이 쌓여 있었다.


묵묵히 책상을 치우면서 흡사 내가 이들과 같은 처지라는 생각이 밀려왔다. 명백한 쓰레기로 분류되지는 않았으나 잉여 같은 존재였다. 어떤 역할을 해야 할지 뭘 해야 할지도 몰랐다. 미처 다 치우지 못한 쓰레기와 섞여 버린 짐을 싸서 집으로 돌아가버릴까도 생각했지만, 이대로 포기하기엔 너무 보여준 것이 없었다. 회사를 나온 이후에도 트라우마가 되어 패배자로 살아갈 것 같았다.


출근길에 울컥울컥 하면서도 조금 더 견뎌보자고 마음을 다독이곤 했다.


달리 방도도 왕도도 없었기에 그저 하루하루 주어진 일에 성심을 다했다. 나를 대변해 주었던 장점들을 상기했다. 성실한 근무 태도, 끝까지 해내려는 자세, 업무에 대한 오너십 또는 책임감, 다년간 분석 업무를 통해 다져온 통찰력 등 이전 부서에서 무용이 되어버린 장점들을 하나하나 꺼내어 써보기로 했다.


무식한 방법이지만, 가장 빨리 출근해서 가장 늦게 퇴근하는 생활을 수 개월 간 반복했다. 반차 휴가조차 사용하지 않았다. 휴일에도 노트북을 켰고, 명절에도 예외는 없었다.



용감한 무식쟁이의 방법이 통했던 건지 시간이 지나면서 새로 만난 상사는 나에게 이런저런 일들을 맡기기 시작했다. 무쓸모로 여겼던 내 장점들을 칭찬해주기도 했다. 이곳에서라면 해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역량을 발휘해보기로 결심했다.


소위 자신감이 붙었다. '단 한걸음의 차이 자신감'의 저자가 정의한 대로, 타인으로부터의 신뢰, 나에 대한 신뢰, 환경에 대한 신뢰가 합쳐져 자신감이라는 감각이 소생했다(안타깝게도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었던 상사는 지난해 퇴사했다).


3년 가까이 지난 지금은 원활한 업무 운영은 물론 경험이 부족한 신규 직원이나 동료들에게 교육을 하기도 한다. 새로운 업무가 주어져도 노하우나 인사이트를 기반으로 두려움 없이 해내고, 담당 Region에 대한 포괄적인 이해와 함께 현지 업무 서포트를 할만큼 깊이가 생겼다. 


하지만 이곳에서의 성장은 여기에서 멈추어도 좋다고 생각했다. 아무것도 없었던 도화지에 충실하게 그림을 그려온 것만으로도 스스로의 가치를 입증하기에 충분하다고 판단했다.


업무 면에서는 성장했을지 모르나 조직 차원에서의 성장에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한계를 그어버리는 말들은 상처로 남아 지속 가능성에 대한 고민을 안겨주곤 했다. 처음부터 넘지 못할 벽이 있는 상태에서 업무에 대한 애정이 생기긴 힘들었고 안타깝게도 끝까지 싹을 틔우지 못했다. 애사심도 충성도도 소멸된 상태에서 더 이상 나를 증명할 필요는 없어졌다.


이곳에서의 미래는 성장이라는 가면을 쓴 소모가 될 것이라는 직감과 함께 퇴사를 결심했다. 한껏 향상된 자신감과 자존감은 나의 미래를 위해 고스란히 사용할 생각이다.


최악이 아닌, 최선의 상황에서 퇴사를 결심하다니 참으로 NICE한 타이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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