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분이 백수로 바뀌자, 다른 퇴사자 in the house 들은 퇴사 직후 어떤 일을 하는지 궁금해졌다. 슬쩍 그들의 일상을 들여다보니미뤄두었던 장기 여행을 떠나겠다는 내용이 심심치 않게눈에 띈다.
시간의 자유, 상하 관계로부터의 탈출, 사무실을 벗어나는 해방. 여행이야말로 이 모든 찬란한 변화들을 오롯이 만끽할 수 있는 최고의 이벤트일 테니까.
하지만 신기하게도 나의 퇴사 후의 시간표에 퇴사기념 여행은 없었다. 시간도 충분한데 말이다. 물론 당분간 혹은 완전히 백수 신분이 되기에 금전적 문제를 고려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 씁쓸하지만 그 이유가 전부는 아니었다.
이는 게으른 천성과도 맞닿아 있다.한순간에 선을 긋기 위한 이벤트는 부단히 움직이고 일을 꾸미는 부지런함을 의미하는 만큼, 기념비적 여행을 위해 애쓰고 싶지는 않았던 거다. 꾸물대는 게 주특기인 만큼 어물쩡, 얼레벌레 원래 여기가 제자리인 듯 이쪽 세계로 넣어오고 싶었다.
다행히 20년간 지속해온 직장인의 관성은 생각보다 약했다. 출근 시간에 맞춰 저절로 눈이 떠지지도 않고 일하지 않는 내가 어색하지도 않으니까. 이쪽 세계에 놀랍도록 빠르게 적응하고 있다.
다만, 선을 확 그어버리지 않았기 때문일까? 가끔은 마지막까지 바둥거리던 하루들이 기억에 스치곤 한다.
눈을 감으면 건물 5층 플로어 중앙 즈음에 위치한 우리 팀과 그 끝에 놓인 내 책상, 그리고 모니터를 뚫어져라 보고 있는 내가 보인다. 음. 여전히 미간은 찌푸리고 있구먼. 물도 안 마시고 화장실 가는 것도 참고 말이지.
받고 싶지 않은 전화가 온다. 심호흡 한번 하고 애써 목소리를 가다듬는다.
급기야빡이 친다며 숨쉬기 위해 책상을 박차고 나간다. 호기롭게 나가더라도 숨 쉴 곳이라고는 삭막한 빌딩 숲 사잇길이다. 그나마 듬성듬성한 나무들 사이를 지날 때면 잠시나마 해방감을 느끼곤했다. 슬쩍 지나가는 나무 그늘 아래 바람이 귀하고상쾌했다.
결론적으로 퇴사 기념 여행을 생략한 걸 후회하지는 않는다.
특별한 장소에 가서 특별한 음식을 먹지 않아도 바다를 보거나 숲길을 걷지 않아도, 같은 시간대에 다른 행위를 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색다른 경험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한낮에 카페에 가고, 남편 매장에 따라 나와서 일을 돕다가 책을 보고, 마쳐야 할 시간을 정해두지 않고 글을 쓰다 눈을 감다를 반복한다.
노는 것에도 진심인지라 일요일 밤늦게까지 술을 마시고(과음은 건강에 해롭습니다만;;) 12시에 오락실에 들어가 출근 걱정 없이 신나게 놀다 온다. 대낮이나 늦은 밤을 가리지 않고홀연히 자전거를 타러 나가기도 하고, 매일 거의 똑같은 옷을 입으며 옷 신경 끄기의 기술을 실천하고 있다. 쇼핑이 뭐예요? 먹는 건가요? 하면서 태생이 미니멀리스트 인척가면을 쓰기도 한다.
강아지들을 쓰다듬다 스르르 잠들어 버리는 것, 한낮에 한가롭게 도서관에 가서 책을 고르는 것처럼그동안 누려보지 못한 느긋한 시간도일상 풍경 중 하니다.
(물론 휴가를 내고 이 모든 걸 할 수도있었지만모든직장인이그렇듯 휴가 때는우선적으로 해야 할 볼일이 있으니전혀 한가롭지 못했다)
마치 크로노스에서 카이로스 시간의 세계로 넘어온 듯하다. 몰입의끝에순삭되어 버릴 때조차버텨내야 할 시간이 아닌, 나를 채우는 시간이기에 전혀 아깝지 않다.
근데 문득, 너무 노는 거 아니야?싶을 때도 있다. 한창 일할 나이에 천방지축 뛰어다니는 것 같아한심하다. 그럴 때는 가슴에 붙인 20년 차 직장인이라는 훈장을 떠올린다. 죄책감 갖지 말고 긴 세월 열심히 살았으니 그냥 좀 놀아보라 한다. 심지어 너무 젊지도 늙지도 않은 애매한 나이의 지금이 딱 놀기 좋은 때라고. 편견 없이 애들 놀이, 어른 놀이 다 할 수 있는 때니까.
퇴사 후 약 1달이 흐른 지금, 나의 매일매일은 초록잎이 무성한 숲길을 걷는 듯 청쾌하다. 듬성듬성 나뭇길에서 사무실로 돌아가야할 시간을 재며 불안하나마 상쾌함을 느끼려 했던 그때와는 다른 호쾌함이 있다. 훨훨 날아갈 것 같은 경쾌함이 더해진다.뜻밖의 여행 중이라고나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