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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소라미 Oct 11. 2023

일본 출장, 원수로 변해버린 짐 가방

출장이 아니라 이사가는 겁니까

2022년 봄. 팬데믹이 완화되면서 일본으로 가는 길이 열렸다. 회사에서는 언제 또 막힐지 모르니, 서둘러 출장을 추진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일정이 확정되자 현지에서 달성해야 할 출장 목표와는 별개로, 내 머릿속은 무슨 옷을 가져가야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으로 꽉 차게 되었다. 옷 차림새에 진심이라 평소에도 다음 날 출근복을 미리 생각해 두는 사람이었기에 열흘 동안 무얼 입고 지내야 할지는 지상 최대의 난제였다.


현지 사무소를 방문할 때는 단정한 세미 정장 정도는 입어줘야겠지?

공장이랑 창고에 가는 날은 활동성이 좋아야 할 거야. 

호텔 격리 기간에는 몸 편한 옷이 최고지.

그러고 보니 공항 갈 때 입을 옷을 안 정했네. 


용도에 맞춰 무엇을 더 넣을지를 고민하다 보니 옷들은 산더미처럼 쌓였다. 게다가 옷을 하나 넣을 때마다 그것과 어울릴 법한 다른 옷이 줄줄이 딸려왔다. 베스트 조합만 선택하고 나머지는 포기해야 했지만 왠지 안 가져가면 아쉬울 것 같아 일단 제2, 제3 옵션까지 모두 포함시켰다. 처음에는 작은 캐리어를 꺼내왔으나, 어림 반푼 어치도 없는 판단이었다. 넉넉하게 큰 캐리어를 가져가기로 했다.


남편이 "출장이 아니라 이사가는 거냐?"며 농을 쳤다.



나리타 공항에서 공항 열차인 스카이라이너를 타는 곳까지는 무탈했으나, 문제는 일반 전철로 갈아타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일본의 오래된 전철역에는 엘리베이터가 없었다. 아니, 있을 수도 있었으나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출장단은 나 포함 5명이었는데 최상위 관리자 일명 "직진 순재 씨"가 앞만 보며 잰걸음으로 걸으니 나머지 인원은 그 속도와 방향에 맞출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최단 경로를 선호했고, 그것은 곧 계단을 의미했다. 그의 캐리어는 가장 작은 데다 백팩을 메고 있어 그 무게도 적절히 분산된 듯 보였다. 반면 내 캐리어는 가장 컸고, 백팩 따위는 없었다. 대신 노트북 가방과 미니백을 한 손에 주렁주렁 달고 다녔다.


그나마 평지는 손에 들린 것들을 얹어서 다니면 되었지만, 계단에서는 균형이 무너질 때마다 자꾸만 휘청 거렸다. 무거워서 미치겠는데 밸런스까지 조절해야 하다니 잠시 캐리어를 버릴까 싶기도 했다. 그 와중에 직진 순재 씨는 계단도 단숨에 올라버린다. 이 상황에서 열차가 오면 망하는 거였다. "신이시여, 저에게 초능력을 주세요." 온몸의 힘줄과 근육, 신이 잠시 하사한 초능력까지 탈탈 털어서 캐리어를 옮겼다.


전철에서 내려 호텔까지는 도보 7분. 부슬부슬 내리던 빗방울이 갑자기 굵어졌다. 다들 백팩이나 가방에서 우산을 꺼내는데 아뿔싸. 현관에 꺼내둔 우산을 안 들고 온 것 같다. 그나마 점퍼에 모자가 달려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고는 필사적으로 끈을 동여맸다. 그나저나 이 옷 방수인 줄 알았는데 완전히 속았다. 씩씩 거리는 사이 바지는 홀딱 다 젖었다. 그날 밤, 호텔 편의점에서 우산을 샀다.



돌아오는 날에도 비가 왔다.


전철이 만원인 데다 여전히 크고 우람한 캐리어에, 한 손에는 노트북과 미니 백을 들고 있었기에 우산이 자꾸만 걸리적거렸다. 이제 공항까지는 외부로 나갈 일이 없을 테니 우산은 버리고 가는 것이 속 편할 것 같았다. 우에노 역에 내리자마자 가판대 옆에 우산을 고이 세워두었다. 미처 우산을 챙겨 나오지 않은 누군가가 요긴하게 사용했으면 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정확히 3분 후, 우에노 역에서 공항철도를 갈아타려면 수백 미터를 실외로 이동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방수 기능에 속았던 그 점퍼를 입고 있었고 또다시 필사적으로 끈을 동여맸다. 반쯤 지난 시점, 바짓단에 물이 스며온다. 안 되겠다. 차라리 뛰자.


달그락달그락 거대한 캐리어를 끌며 빗속의 뜀박질을 시작했다. 그러나 20미터쯤 갔을까 미니 백 안에 있던 물건들이 타닥타닥 튀어나왔다. 빗물에 젖은 립스틱을 젖은 바지에 닦고는 터덜터덜 걸었다. 거울은 안 봐도 뻔했다. 물에 빠진 생쥐 꼴에 달아오른 얼굴.


역시나 가장 먼저 도착한 "직진 순재 씨"는 빗속을 걸어왔다고는 생각되지 않을 만큼 말끔한 차림새와 여유있는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일본에서는 가지고 간 옷의 반도 입지 못했다. 막상 옷을 선택하려니 제2, 제3의 옵션보다는 베스트 코디로 생각했던 것이 가장 잘 어울렸기 때문이다. 호텔 근처에 식사하러 나갈 때에도 굳이 옷을 엄선해서 입지 않았다. 마실 나가는 복장이면 충분했다.


결론적으로, 필요하지도 않은 옷들을 짊어지고 다니느라 고생만 한 꼴이었다. 옆 사람들 사정은 아랑곳하지 않는 "직진 순재 씨"만을 원망하기엔 내가 너무 어리석었다. 평소 그를 상사로서 우러러보지는 않았지만 간소하고 소박한 출장 가방만큼은 존경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백팩 좌우측 파우치에 우산과 물병을 넣고 다녔고, 공항열차나 전철 안에서 줄곧 책만 읽었다. 그의 가방 안에 어떤 물건이 있었는지 알 길이 없지만, 적어도 나처럼 사용하지도 않을 물건을 분별없이 모두 싸들고 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나는 의미 없는 옷들을 챙기느라 필수 용품인 우산은 두고 가는 바보 같은 짓까지 했으니.


우에노 역에서 우산을 버리게 된 것도, 쓸데없이 큰 캐리어 때문이었다. 가방 부피가 작았다면 우산을 짐스럽다고 느끼지는 않았을 테니까.


돌이켜보면, 열흘간의 일본 출장은 곧 내 인생의 단면이었다. 소유에 집착하고, 감당하지 못할 짐을 끌고 다니며, 통제하지 못할 물건들에 둘러싸인 삶이 그대로 투영된 것이다. 무엇이 진짜 중요한지 구별하지 못하니 분주하고 번잡스럽기만 하루를 보내던 날들이었다. 젖은 바지로 올라탔던 공항 열차 안에서  가방을 버려버리고 싶었던 것은 이런 삶에 대한 넌덜머리가 아니었을까?


이제 나는 여행을 준비할 때마다 "직진 순재 씨"의 가방을 떠올리곤 한다. 작지만 알차고 실속 있는 가방을 꾸려본다. 방법은 내가 했던 것의 반대로만 하면 된다. 무엇을 더 넣을지가 아닌, 무엇을 더 덜어낼지를 먼저 생각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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